경기도청 이전 발맞춰 이듬해 수원으로 와 '활로 모색'
윤전기·납 활자 이동 '대작업' 거쳐 1969년 '기념식'
1973년 경기매일신문·경기연합일보·경기일보 '통합'
정론직필 정신… 도청 소재지 '최초 언론사' 자리매김
그중 하나인 경기연합일보는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8년 수원으로 이전하자 이듬해 인천에서 수원으로의 본사 이전을 단행한다.
1969년 4월26일 오후 2시 수원시 교동의 2층 짜리 적산가옥 앞에서 열린 경인일보 이전 기념식은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시작됐다.
"1968년 8월15일 인천신문(경인일보 전신)은 경기연합일보로 게재하고(사명을 바꾸고) 사세 확장에 안간힘을 다했으나 극심한 운영난에 빠져 지역언론의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직면했습니다."
본사 이전도 경인일보의 위기가 아니었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경기도청 소재지로 본사를 옮겨 활로를 모색해보자는 구상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전망 속에 본사 이전은 희망을 향한 전환점이었다.
당시의 경인일보 구성원들은 인천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인천-수원 사이 교통망이 열악해 출퇴근에 편도 3시간 이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수원 본사 이전 결정에 따라 퇴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회사 살림을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문을 인쇄할 윤전기를 통째로 옮겨오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활자를 옮기는 것이었다. 납으로 만든 활자를 활용해 문선공이 하나의 글자로 만들어 신문을 인쇄했는데, 한 글자당 수백 개에 달하는 납 활자가 흩어지지 않게 이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인천과 비교되는 수원의 생활 환경도 문제가 됐다. 당시 개항도시였던 인천은 인구 60만명의 명실상부한 경기도의 중심이었던 반면 수원은 고작 인구가 6만명에 불과한 그야말로 낙후된 도시였다.
모던시티를 떠나 시골로 오게 됐다는 상실감은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느낀 바였다. 수원 사옥 앞 도로 역시 포장이 되지 않은 채여서 비라도 오면 흙탕물이 튀겨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창식(1930~) 당시 경인일보 편집국장(4·5대)은 "인천본사 근무 시절에 수원지국을 찾아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다녀가 보면 시골도 그런 시골이 없었다. 인천만 해도 항구도시고, 개항하고 서양문물이 들어온 데다가 미군 문화까지 융합돼 활기찼다. 모든 게 인천의 10분의1에 불과했다. 팔달문에서 장안문까지 모든 도로가 비포장이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환경 속에 12명의 편집국원이 4면 짜리 신문을 수원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인천은 수원과 함께 경기도에 속했고, 인천 소식과 수원 소식을 나눠 다루는 일은 없었다. 하나의 신문에 인천과 경기의 소식이 모두 담겨 나왔다.
인천서 출퇴근하기가 힘들었던 경인일보 구성원들은 사옥 앞 수산여관에서 단체 합숙을 했다. 단칸방에 이불 하나를 너 댓이 함께 덮고 기거하던 시절이었지만, 여관방에서는 도청 소재지에서 신문을 만든다는 열기가 끓어올랐다.
사옥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인 옛 단추공장에 마련됐다. 수원에서 이 단추공장처럼 큰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적산가옥을 소유한 이명석이 경인일보 본사 이전에 영향을 미친 이병희(1926~1997) 국회의원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2층짜리 빨간 벽돌 공장이었는데 1층에는 신문을 찍어내는 공무국과 광고를 담당하는 업무국, 2층에는 편집국이 위치했다.
1층엔 일본제 마르노니 윤전기가 돌아갔다. 1960년대 지역신문 중 윤전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언론사는 매우 드물었다. 윤전기에 신문을 찍어내기 전, 납 활자를 주자기(글자를 주조하는 기계)에 넣게 되는데 이 작업 중에 납 냄새가 심하게 났다.
이 때문에 2층 편집국에는 마감하는 와중에도 새카만 연기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올라오곤 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새 출발을 하는 전환기 경인일보에는 활기가 넘쳤다.
1967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경기도청 소재지가 바뀌었으나 수원은 여전히 번듯한 일간지 하나 없는 언론 불모지 상태였다. 군 출신으로 도청 수원 이전의 주역인 이병희 의원이 도청에 이어 경인일보도 수원으로 이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정치부 기자로 6대 국회를 출입했던 이창식 국장의 설득과 제안이 영향을 미쳤다.
경인일보 이전을 돕기로 한 이 의원이 발행인·사장으로 외화를 수입해 오던 불이무역 사장 이현수를 섭외하면서 본사 이전 후 새 출발을 할 경인일보의 구도가 잡혔다.
구성원의 면면도 화려했다.
인천본사에는 정치부 차장인 조창환, 강훈천·김지선 기자, 체육부 차장 손병균, 경제부 차장 정오현이 남았다.
수원본사에는 이현수 사장과 이창식 편집국장을 필두로, 박희태 업무국장이 자리했다. 이병희의 정책보좌관이었던 김진동은 논설위원, 이후에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우봉제, 윤석한이 상무를 맡았다. 조한길·오광철 부국장, 최만석·이창윤·조동기·이철훈 등이 취재진을 꾸렸다.
경인일보 편집부국장을 거쳐 경기일보 논설위원, 인천일보 이사를 지낸 이천우가 수원본사 이전 후 공채로 합류했다.
이천우와 함께 김성환, 임순만, 유재천이 서울 소재 정부부서를 출입했다. 제10대 경인일보 사장을 지낸 김건영 전 사장은 당시 의정부 주재기자를 맡고 있다가 이 국장의 부름으로 수원 본사로 이동했고, 역시 제20대 사장을 지낸 김화양 전 사장도 같은 시기 평택 주재기자를 하다 본사 근무로 전환했다.
경인일보·경기방송 사장을 지낸 우제찬 전 사장도 같은 수원 토박이 출신인 정진철과 함께 이때 경인일보로 합류했다.
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인천에서부터 이창식 국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 온 김전기, 사진기자 계일성은 매일 수산여관에 머무르는 고정 멤버였다. 1963년 인천신문에 입사해 경인일보 15대 편집국장을 지낸 김기룡은 수산여관 대신 몇 천원 짜리 하숙방을 구해 출퇴근했다.
도청 소재지 최초의 언론사로서 수부도시에 자리잡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 기관의 장이나 지역 유지들이 편집국장을 만나기 위해 사옥 2층에 줄을 섰고, 이들의 인사를 받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공화당 출신의 홍대권이 영업 상무로 오며 광고를 둘러싼 갈등이 사내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군 출신으로 정치권을 거쳐 언론사에 입성한 홍대권은 기자들에게 광고 영업을 강요했고, 순수하게 신문만 만들고 싶다는 기자들과 맞섰다.
신군부가 들어서며 홍대권은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이즈음 수원시 조원동은 '마누라는 없어도 장화는 있어야 식구가 산다'고 말할 정도로 포장되지 않은 험한 토지였는데, 경영진들이 신사옥을 짓겠다며 조원동을 비롯한 이쪽 저쪽 땅을 마구 매입했다. 이 땅들은 대부분 회사 소유가 아니라 개인 소유로 돌아갔다.
퇴근 후 술 한 잔 걸치는 문화는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심은 사옥 맞은 편 중국집 실비옥을 주로 갔고, 저녁엔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팔미옥'에서 만났다. 감자탕에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이며 밤이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게 편집국의 문화였다.
기자들이 한 시절 젊음을 바친 적산가옥은 허물어진 지 오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홑겹 이불에 잠을 해결하던 수산여관도 허물려 지금은 고시텔이 들어섰다. 도청 소재지에 첫 언론사가 나타났다는 흥분과 떨림도 세월과 함께 산화했다.
늦은 밤 컴컴한 수원 시내를 채웠던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현재의 경인일보 신문은 디지털로 제작돼 서울의 인쇄소에서 찍혀 나온다. 너도나도 디지털을 부르짖으며 신문이란 구시대의 산물이 됐다.
이런 시대에도 신문이 의미 있는 것은 그제나 이제나 신문에 바르고 정직한 그날의 소식을 담고 싶은 기자들의 열정 때문이다.
다시 1969년 4월26일. 그날의 경인일보 이전식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된다.
"저희 신문사는 '도민을 위한 도민의 신문'으로 정론직필의 정신을 이어가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부단한 성원을 간청드립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