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때 '중부전선 청년 모두 철수 목표' 60만명 넘게 소집
'즉시전력 아니라 안전' 징집 응해… 남쪽 교육대로 이동명령
주요 도로망 금지상태 지휘체계·군복 없이 엄동설한속 산길행
교육대 도착후 '포로 보다 못한 식량 배급' 최악의 복병 만나
횡령·상납으로 '보급 구멍'… 1951년 공식 사망자는 1234명
전염병 '발진티푸스' 치명타도 모자라 '전국 전파' 원인 불명예
기억되지 않는 비극 속에 비극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숨졌다. 그들 중 희미하게 비극을 기억하는 일부가 남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당시를 증언할 뿐이다. 한국전쟁의 잊힌 주인공은 바로 국민방위군이다.
#시작부터 예정된 비극
국민방위군은 1950년 이승만 정부가 국군의 예비군 성격으로 모집한 병력이다.
전쟁 초기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렸으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반전에 성공해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 땅까지 전선을 북상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중국군 개입으로 전황은 다시 한 번 반전되는데, 바로 이 시기가 국민방위군이 모집된 때다.
1951년 1월4일, 서울을 포기하는 1·4후퇴를 앞두고 정부는 수도권과 강원도 등지에서 청년들을 대대적으로 모은다. 국군에 이은 제2국민병으로 만 17세에서 만 40세까지의 남성이 소집됐는데 그 규모만 60만명이 넘었다. 국민방위군 소집은 실은 중부전선에서 청년들을 모두 철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앞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 미처 후퇴하지 못한 주민들이 북한군 점령시 공산당에 협조했거나 협조한 것으로 의심받는다는 이유로 좌우갈등이 극심해졌고, 이번에는 그런 갈등을 피하겠다는 의도에서 국민방위군을 모집해 남쪽으로 소개시키려 한 것이다.
청년들은 일명 '지게부대'로 불리며 보충병력 역할을 할 국민방위군이 전장에 즉시 투입되는 국군보다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불리한 전황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징집에 응하며 대규모로 국민방위군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1950년 12월 전국적으로 징집된 국민방위군들에겐 남쪽의 교육대로 가라는 단순한 명령이 주어졌다. 지휘체계와 보급이 갖춰지지 않은 이 단순한 명령이 수많은 피해를 양산한 배경이 된다.
주요 도로망은 군사용으로 지정돼 이동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국민방위군은 산길을 통해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군복이 보급될 줄 알고 가벼운 옷차림에 음식이나 돈을 마련하지 못한 국민방위군이 많았고, 이들은 12월부터 1월 사이 엄동설한에 고난의 행군을 벌이게 된다.
화성 출신 국민방위군 유정수(1925~2010)씨의 일기에는 이런 사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50년 12월25일 작성한 일기에 그는 "연대장이 훈개하여 가로대 지난밤 여기서 동사자가 3명 났으니 너이들도 정신 차리라는 것이였다"고 썼고, 또 "이화령 넘어 문경착 죽을 고생을 한 기억이야 생사 잊지 못할 터"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보급없는 군대
더 큰 문제는 교육대 도착 뒤에 시작된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마련된 교육대에는 식량이 부족했다.
유씨는 일기에 "식사도 오날부터 일식에 1합(홉)1작으로 주러 붙고, 국도 없어 어느 때는 메르치 여나문마리, 또는 된장 한숫가락 때로는 고등어나 갈치 조기 같은 것을 오, 육인 앞에 짜게 쩌서 한 토막씩 준다. 국을 끊여 준대야 맨 된장국이라 간을 않처서 맹물 같은대 그나마 반사발 밖에 안준다"고 전한다.
1일 3홉을 배식 받은 셈인데, 당시 전쟁포로는 1일 5홉5작(홉보다 작은 단위)를 배식받아 국민방위군보다 사정이 나았다.
단지 전쟁통이었기 때문에 식량이 없었던 걸까? 열악한 상황을 감지한 제2대 국회가 국민방위군의 보급 체계를 조사한 결과, "예산 영달을 위한 허위인원 조작, 예산지급시 선공제, 납품 허위기재, 횡령 및 상납과 국방위 최고위층 비호 심각"이라는 결론(1951년 3월)을 내린다.
국회 조사로 촉발된 수사 결과, 국민방위군에 쓰여야 할 현금 24억원과 양곡 1천800가마가 부정처분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국방예산 전체가 250억원으로 예산의 10분의1 가량이 횡령된 셈이다. 이 사실로 국민방위군 사령관, 부사령관, 재무실장, 조달과장, 보급과장은 처형됐다.
#부대를 휩쓴 전염병 공포
지금까지는 이동과정 혹은 교육대 생활 중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이 많았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국민방위군 총 징집자는 68만명이고 공식 사망자는 1천234명이다. 이동 중 사망한 행려사망자는 '불명'이라는 게 1951년 국방부 조사 결과다.
여기에 숨어 있던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부대를 휩쓴 전염병 '발진티푸스'다. 발진티푸스는 급성 발열성 질환으로 몸니를 통해 전파된다. 이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때 생기는 해충인데 교육대의 열악한 환경이 몸니를 증식시켰다.
1950년까지 발진티푸스는 한국에서 흔한 질병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인성 질병인 이질이나 장티푸스가 가장 흔한 전염병에 속했다. 1950년 2천523건이 발생한 발진티푸스는 1951년 3만2천221건으로 발생빈도가 폭증한다.
바로 국민방위군의 영향이다.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공식 문서를 통해 국민방위군이 발진티푸스의 주된 피해자이자 전국 전파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화도에서 징집된 국민방위군 류기안(89)씨는 부산 교육대의 상황을 "틈만 있으면 양지 쪽에 앉아서 옷을 들고 이를 털곤 했다. 이 수 천마리가 고여 있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가 쓴 수기에는 "한 천막에다가 200명씩 지버넣었으니 잠을 자기커녕 앉어있을 자리도 비조바서 밤새 고생을 하다"는 구절이 있다.
횡령으로 발생한 보급의 구멍, 그로 인해 나타난 열악한 생활 환경은 전염병의 확산을 초래했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이임하 교수는 이 당시의 발진티푸스는 '사회적 질병'이라고 칭하며 "국민방위군으로 동원된 국민은 군대에서 병을 얻었고 이후 귀향하면서 이를 전국으로 퍼뜨린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