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전염 막기 위한 인근 지역 선제 조치
2016~2017 경험탓 반경 3㎞로… 세계 유일
밀집사육 대안 '친환경 농장'도 예외 없어
윤종웅 가금수의학회장 "18C 논리" 비판
공기전파 특성으로 생긴 '방역관습' 주장
사육기간 따른 '백신 사용' 해법으로 제시
예방접종이 살처분보다 85% 경제적 이점
"과도한 방역에 익숙해져… 이건 바꿔야"
'죽여서 처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살처분(stamping out)은 감염된 동물로 인한 전파를 막기 위한 효율적 수단이다. 이 살처분 앞에 '예방적'이란 수사가 붙는다. 감염은 되지 않았지만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해 감염병 발생 농가 반경 3㎞ 이내에 소재한 모든 농가의 가축을 죽여서 처리하는 것이다.
# 지극히 '한국적인' 살처분
한국육계협회에 따르면 가금류를 기르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살처분을 방역 수단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범위는 차이가 있다.
한국·네덜란드·덴마크·독일·영국·이탈리아·프랑스·미국·일본 모두 감염 발생 농장은 살처분을 하지만, 역학 관계에 있는 농가까지 살처분하는 국가는 한국·네덜란드·이탈리아·미국·일본이고 예방적 살처분을 하는 국가는 한국과 네덜란드, 반경 3㎞까지 살처분을 하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계기는 있었다. 대규모 AI가 발발한 2016~2017년 창궐하는 감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경험으로 지난 2018년 AI SOP(긴급행동지침)를 강화해 살처분 반경을 3㎞까지 넓힌 것이다.
왜 한국은 매년 AI가 창궐할까? 원인은 '밀집 사육'이다. 좁은 국토에서 많은 수의 가금류를 사육하려다 보니 밀집 사육은 필수가 됐고, 한 마리만 감염돼도 최대 수십만~수백만 마리가 살처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밀집 사육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닭 한 마리당 사육 면적을 A4 용지(0.062㎡) 한 장도 되지 않는 0.05㎡에서 0.075㎡로 상향했지만 여전히 A4 용지를 조금 웃도는 면적 위에서 닭이 사육되고 있다.
# '친환경'도 예외일 수 없다는 국가
살처분이 다시 화두로 떠오른 건, 밀집 사육의 대안으로 제시된 '친환경 농장'이 살처분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반복된 AI에 대해 학계와 언론 등은 밀집 사육 대신 방목식으로 천천히 가축을 기르는 친환경 농장을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지난 1984년부터 닭을 사육해 온 화성시 향남읍 산안마을(1월27일자 2면 보도)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차례도 AI가 발생하지 않았던 곳이다. 주민 25명이 친환경 농법으로 풀과 현미를 먹여 3만7천여 마리를 사육한다. 1㎡당 4마리 이하라는 자체 기준으로 면적을 정해 공장식 밀집 사육을 배척했다.
이 농장도 예방적 살처분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인근 농가의 AI 발생으로 대상이 됐지만 살처분을 거부하며 방역 당국과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밀집 사육이란 근본 문제를 해결한 농가조차 방역 필요에 의해 살처분 대상이 되자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일방적인 살처분 정책을 재고하란 목소리가 나온다.
# 멈춰야 할 비극
한국가금수의학회 윤종웅 회장도 살처분 반대에 목소리를 더하는 인물이다. 그는 최근 펴낸 책 '이기적인 방역 살처분·백신딜레마'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윤 회장은 한국식 동물 방역의 문제와 살처분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으면서 '백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그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윤 회장 주장의 가장 주된 부분은 3㎞란 반경의 '허구'다. 한국은 3㎞ 반경내 농장을 공동 운명체로 묶지만, 오히려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제외하곤 역학적으로 무관한 곳이 많다는 것이다. 사료와 약품 거래처가 겹치지 않는다면 바이러스를 공유할 일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마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옆집이 가깝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서로 왕래가 없다면 다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서로 알 수 없는 관계인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3㎞ 방역대는 공기로 전파될 수 있다는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방역 관습'에 불과하며 하루에도 철원에서 부산까지 이동할 수 있는 현재 상황에는 반드시 역학적으로 주변 농장만 위험하다고 치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윤 회장은 3㎞ 반경내 예방적 살처분을 "18세기 논리"라고 일축했다.
이뿐 아니라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방역 방식들, 이를테면 소독약을 대량으로 살포하도록 제작된 차량으로 야외를 소독한다거나 드론으로 소독약을 공중에서 살포하거나 생석회를 차량 바퀴에 뿌리는 방식 모두 "과도한 방역이 모자란 방역보다 낫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결국 감염될 농장을 모두 없애서 공무원들 편하자는 주장에 도달한 듯 보인다"면서 "이런 상황에 대해 농장과 생산자들은 왜 생존권 주장을 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한다.
# AI도 '백신'이 핵심
윤 회장은 친환경 농장을 추종하는 부류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공장식 축산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고 동물복지는 궁극의 해결책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지만, 독일과 네덜란드에선 기생충·골절 등 더 많은 질병과 부작용으로 동물 복지 시스템에 대한 회의론과 무용론이 지속되고 있다. 동물복지 사육 환경과 좋은 사료라도 전염성 질병의 위험은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백신'이다. 균을 완전히 죽여 변화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 형태의 사독오일백신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마리당 50원 수준의 백신을 제조하고 유지 보수하는데 25억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긴급방역비용으로도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2007년부터 저병원성 인플루엔자 생산시설이 갖춰져 있어 제조 기술도 충분한데다, 현재 백신을 위한 항원 뱅크 수립 단계까지 이르른 만큼 결심만 선다면 백신도 가능하다.
윤 회장은 "살처분과 백신은 한 가지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사용해야 큰 효과가 난다. 바이러스를 빠르게 제거하는 살처분의 장점과 바이러스 확산을 늦추는 백신의 장점을 함께 살려 사용해야 한다. 오래 키우는 산란계와 종계에 백신을 접종하고 사육기간이 짧은 육용계는 백신 대신 살처분을 택하는 게 좋다. 육용오리도 겨울철 '휴지기'로 사육을 통제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축산경제연구원 2020년 조사를 보면, 최대 가금 산업단지인 포천·음성 지역에 예방적 백신을 하는 것이 보상비가 비싼 살처분보다 85% 경제적 이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백신 정책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건, 살처분과 같은 과도한 방역에 익숙해져 있어서다. 또 행정기관의 구조상 백신이라는 실험적 모험을 감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어서 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취재 과정에서 윤 회장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건 꼭 바꿔야 될 역사에요."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