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외 누볐지만 외로웠던 젊은 시절
초교 교장 선생님 만나 미군부대에 취직
형과 양계장 운영에 전국 양조장서 일해
'중동 붐' 일자 바레인·리비아까지 건너가
# 아직도 눈 감으면 선한 고향 '연백'
대규모 염전에 평야까지 풍요로웠던 곳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한번도 하지않아
'北유지 출신 불발' 소문에 생각도 안해
실향민은 분단이 낳은 디아스포라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단산리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황영석(86)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황 할아버지는 피란 이후 삶의 근거지를 인천으로 두고 경북 포항, 전북 전주, 전남 순천·목포, 중동의 바레인과 리비아까지 안 살아본 데가 없을 정도로 국내외를 누볐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본 어느 곳보다 가까운 그곳, 고향 땅은 70년 동안 단 한 번도 다시 가지 못했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직선거리로 약 3㎞ 떨어진 황해도 연백은 헤엄쳐서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멀리서나마 고향 땅을 보고 싶은 마음에 교동을 찾아도 산 하나에 딱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저 산만 없었어도…." 할아버지는 탄식할 뿐이다.
지난 8일 남동구 간석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황 할아버지는 반명함판 크기의 사진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줬다. 할아버지가 중학교 때 사진관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인데, 낡고 물에 젖어 흐릿하다. 고향에서 가져온 것 중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황희 정승을 배출한 장수 황씨 집성촌에 살았는데, 흔히 '유지'라고 불리는 집안이었어요. 6·25사변 전에는 우리 동네가 남한이었고 전쟁이 나면서 북한 인민군이 점령했어요. 부모님이 70세가 넘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 멀리 갈 수 없어서 1951년 1·4후퇴 때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인민군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군인들을 지팡이로 때리면서 막아 한 번은 피했지만, 두 번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집을 나왔어요. 큰 형은 먼저 피란 갔고, 고향에는 할머니와 부모님, 남동생 셋, 여동생 하나가 남아 영영 못 보게 됐습니다."
황 할아버지는 연백에서 배를 얻어타 강화군 석모도, 강화도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현 중구 신흥초등학교에서 신흥로터리로 가는 길목에 연백군 피란민 연락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먼저 나온 형의 소식조차 모르고 갈 곳이 없던 10대의 황 할아버지는 연락사무소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다 연백초등학교에 다닐 때 근무했던 교장 선생님을 연락사무소 앞에서 만났다.
"연백초등학교는 전교생이 2천500명이나 되는 큰 학교였는데, 조용한 학생이던 나를 교장 선생님이 알아봤어요. 유지 아들이어서 그랬나 봅니다.
교장 선생님이 도원동에 목공소를 차린 고향 사람에게 저를 데려가 줬고, 거기서 지내면서 축항(인천항)에 있는 미군부대에 취직했어요. 수소문 끝에 만난 형님이 시골로 내려가자고 해서 지금의 구월동에 살던 지인 집에서 3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 전쟁이 끝나고 해병대에 입대했어요."
황 할아버지는 포항에 있는 해병대 제1사단 상륙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피란민 출신에 텃세가 심해 상급자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부대에서 '깡다구'가 세기로 소문이 났지만, 계급사회이다 보니 간부들 입장에선 골칫거리였다. 결국 부대장이 할아버지에게 부대내 매점인 PX(Post Exchange) 운영을 맡겼다.
황 할아버지 입을 빌리자면 당시 부대장이 PX에서 "많이 남겨 먹었다"고 했다. 부대장은 "내가 병까지 팔아야 하겠느냐"며 할아버지에게 빈 병을 넘겨줬고, 그걸 팔아서 할아버지도 쏠쏠히 용돈을 벌었다고 한다. 지금 군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전쟁 직후에는 다들 그렇게 먹고 살아야 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제대 후 다시 갈 곳이 없어진 황 할아버지는 인천 구월동으로 돌아와 형과 함께 양계장을 했다. 현 남동경찰서 뒤에 있는 구월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자리에 양계장이 있었다. 그러나 형과 의견이 잘 맞지 않아서 제물포역 인근에 있던 와룡양조장에 취직했다고 한다. 와룡양조장은 인천 일대에서 유통되던 '와룡소주'를 만든 양조장으로 유명했다.
"1960년대까지 와룡양조장에서 일하다 전주에 있는 주정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겼어요. 이 시기 국순당을 창업한 배상면씨와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배상면씨가 술을 빚을 효소를 찾아 당시로는 값비싼 현미경을 들고 전국의 양조장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이후 순천에 있는 양조장으로 옮겼다가 목포에 있는 보해양조로 이직했는데, 대우가 좋았죠. 보해양조 창업주 임광행씨가 나를 무척 아꼈던 기억이 납니다."
1970년대 '중동 붐'이 일자 황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돌아와 지역 물류기업인 영진공사가 진출한 바레인국제공항으로 직장을 옮겼다.
항공기 케이터링(Catering·음식 공급) 분야에서 근무하다 리비아로 건너가 항만 하역 쪽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황 할아버지의 아들도 현재 항공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게 황 할아버지는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인 처지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가정을 일궜다.
황 할아버지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연백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고향의 풍경이 선하다.
황 할아버지는 '왜정 때' 대규모로 만들어진 염전에 평야까지 여러모로 풍요로웠던 공간으로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 분단이 되지 않았다고 상상한다면, 황 할아버지는 여전히 고향 땅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은 채 가족들과 평화로이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황 할아버지는 이제껏 한 번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않았다. 형이 한차례 신청은 했었는데, 북한에서 유지 출신 월남인 상봉은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면서 아예 신청할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물론 남은 형제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지금까지도 20명 이상 꼬박 나오는 연백초등학교 동창회가 가족을 대신해 서로를 위로하고 안부를 물으며 명절을 챙긴다.
이들 실향민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통일부의 남북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로 추산한 실향민은 지난해 1월 기준 5만2천465명에서 올해 1월 4만9천154명으로, 1년 사이 3천311명이 세상을 떴다.
같은 기간 실향민이 가장 많은 경기도는 1만5천807명에서 1만4천831명으로 976명 줄었다. 경기, 서울 다음으로 많은 인천시는 4천287명에서 4천1명으로 286명 감소했다. 인천은 곧 4천명대가 무너진다.
남북의 냉각기가 이어지고 있어 이산가족 상봉은 기약이 없다.
"명절만 되면 북에 두고 온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요. 지금은 손주까지 봐서 많이 나아졌지만, 피란 내려와 홀로 보낸 젊은 시절은 참 많이 외로웠어요. 지금도 연백 출신 실향민들이 고향과 가까운 강화 교동도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고향 땅을 밟고 가족을 만날 그 순간을 아직도 기다립니다."
황 할아버지는 올해에도 이렇게 새해 소망을 빌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황영석 할아버지는?
1935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나고 자랐다.
1951년 7월 16살의 나이로 인천으로 피란 와 미군부대, 양계장, 양조장, 중동 지역 공항·항만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분투하며 살았다.
현재는 인천 지역 황해도 연백군민회 일을 맡아 연백 출신 실향민들을 챙기면서 평범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