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주부들과 가내수공업 공장 시작
새벽부터 집안일 끝낸 후 자동차 베어링 다듬어
10년 일하는 감각 익힌 셈·타파웨어 딜러 3년도
보석사우나 '망우석' 수입 유통… 남편까지 지지
# 가장 값싼 포장지가 빛나는 순간
수억 원 사기 '타격'… 재기의 사업 아이템 발견
男영업문화 슬기롭게 극복 거래처 수십 곳 뚫어
40~60대 여성 자격증 취득·재취업 '디딤돌' 역할

그러나 경기도에는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에게 재취업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다. (사)한국여성지도자연합(이하 여지연)이다. 여지연 경기도지부장으로서 17개 시·군 지회에서 1천500명의 회원에게 취업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류현숙(63) 효성에어캡 대표를 30일 수원 인계동 경인일보 사옥 브리핑룸에서 만났다.
류 대표는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만큼 뛰어났지만 수십 년을 집에서 주부로 지냈다. 지난 1982년 공무원과 결혼해서 2004년 사업가로 변신할 때까지 22년 동안 집에서 살림을 도맡았다.
류 대표는 "그때만 해도 공무원 아내가 집 밖을 나가고 '내조'를 잘 못하면 '철밥그릇이 개밥그릇으로 바뀐다'고들 했다. 오후 6시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집안일에 전념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른 새벽부터 집안 청소를 하고, 남편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끝내고, 우는 아이의 기저귀까지 갈고 난 후 그는 동네 주부들을 모아 일종의 가내수공업 공장을 차렸다. 10년간 자동차 베어링(모터의 축을 지지하는 부품)을 다듬어 공장으로 보내며 '일하는 감각'을 체득했다.
세기가 바뀌고 자녀가 어느 정도 자라자 이번엔 타파웨어(전자레인지용 플라스틱 용기) 딜러로 3년을 또 일했다. 류 대표는 "일하는 여성으로서 밑바탕을 쌓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전국에 '보석사우나'가 유행했던 2004년 류 대표는 마침내 일을 벌인다. 사우나에 들어가는 망우석(초록색 보석)을 수입해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가로의 전업을 말릴 것만 같았던 남편은 오히려 열렬한 지지자가 돼 주었다.
설렘도 잠시, 초보 사업가였던 류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수억원의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낙심해 망우석을 도로 포장하던 류 대표의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은 그 망우석을 싸고 있던 에어캡이었다. "에어캡은 가장 값싼 포장지잖아요. 포장뿐 아니라 택배를 보낼 때도 많이 쓰일 것 같았어요."
마침 그 무렵 그릇 도매상에 갔는데 그릇마다 에어캡이 끼워져 있었다. 현재처럼 제조에서 유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정확히 예측한 건 아니지만, 막연하게 느낌이 좋았다. 2007년 그는 오래된 공장을 임대해 효성에어캡이라는 새로운 회사를 출범한다.
류 대표가 가장 공들인 건 설비였다. 작은 물건 포장용으로는 7파이(약 22㎝) 크기의 에어캡이 쓰이지만 이삿짐 포장용으로는 20파이(약 63㎝) 짜리가, 인쇄용품·건설장비 포장용으로는 30파이(약 94㎝) 짜리가 쓰이는 등 용도에 따라 에어캡 크기가 달라지는 데 주목했다.
다양한 종류의 에어캡 생산 설비를 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은 지역 금융기관과 은행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2~3년밖에 안 됐는데도 기술보증기금이 사업성을 인정해 제법 큰 규모로 보증을 서 주고, 기업은행도 자금력을 보탰다.
류 대표는 "내가 갚아야 할 돈이며 세금을 안 밀리고 꼬박꼬박 내려 하니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졌던 시기"라고 말했다.

거래처에 일반화돼 있던 술·골프 등 중년 남성 특유의 영업문화를 그는 슬기롭게 극복했다.
때로는 '나도 남자다'라고 생각하고 골프를 함께 치며 어울렸지만, 여성에 대한 장벽이 여전하다고 느껴질 때면 남성 부장에게 바통을 넘기기도 했다. 정해진 방법은 없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내 물건을 팔고 싶다는 진정성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결국엔 삼성전자 1차 벤더까지도 류 대표를 믿고 거래를 맡겼다.
시대적 조류를 살피는 일도 잊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당시는 택배 문화가 처음 싹틀 때였다. 값싼 포장재로서 에어캡의 수요가 두터워졌다.
무엇보다 야후·라이코스·세이클럽 등 포털사이트가 속속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류 대표는 이를 놓치지 않고 포털사이트에 공격적으로 광고를 개시했다. 광고를 보고 주문이 하나둘씩 들어오더니 3개월이 지나니 거래처 수십 곳이 뚫렸다.
3년쯤 됐을 때 창문 단열용 에어캡이 시장에서 반응을 얻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집 안의 외풍을 차단할 수 있는 창문용 에어캡은 기업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4년 만인 지난 2011년 구공장 임대였던 공장을 5천610㎡ 규모의 새 공장으로 바꿨다. 이후 각종 ISO 인증을 받는 등 기술력을 쌓아 현재는 수도권 에어캡 업체 수십 곳 중 5위권 업체가 됐다.

현재 류 대표는 사업가뿐 아니라 지역 경력단절여성의 디딤돌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여지연은 결혼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던 40~60대 여성들이 전문 교육을 받고 치매 치료나 다도, 웃음치료 자격증을 취득해 재취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열심이다. 사랑의 열매, 빨간밥차, 유엔난민기구,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등 정기 후원하는 단체만 10여개다. 최근엔 유니세프에서 장기후원 감사패도 받았다.
류 대표는 "여성들이 자신감을 잃지 말고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취업이나 창업의 경쟁률은 예전보다 높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진입 장벽이 낮아진 시대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기 지역의 경력단절여성에게 이 말을 남겼다. "절대 실망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세요. 1인 기업이 100인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이여진기자 aftershock@kyeongin.com, 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 류현숙 대표는?
△ 2009년 7월효성에어캡 설립
△ 2011년 2월 경기도지사 표창
△ 2014년 10월 (사)경기도여성단체협의회 법인이사(현)
△ 2016년 2월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2018년 3월 국세청 모범납세자 및 아름다운납세자상 수상
△ 2018년 3월 화성상공회의소 의원(현)
△ 2020년 2월 (사)한국여성지도자연합 경기도지부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