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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천주교, 인천 통해 한반도로… 곳곳 역사적 인물·장소
김대건 신부 등 순교인 소개… 병인박해 '형구돌' 전시
일제강점기 사회 헌신, 전학준 신부 등 외국인 사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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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국내 천주교 역사에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다. 오랜 기간 서울의 관문이자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해온 인천은 국내 천주교 유입의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다.

1800년대 초반부터 인천 곳곳에는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천주교 전파를 위해 조선으로 향한 선교사들은 인천을 통해 한반도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중국에서 출발한 선교사들은 서해5도 백령도와 인천항 등을 거쳐 입국했다. 179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 선교사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시작으로 국내에 첫 대규모 선교단을 파견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단 등이 개항 직전인 1880년까지 이 경로를 이용했다.

이렇게 인천은 천주교와 관련한 역사적 인물과 장소를 어느 곳보다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의 묘역과 답동성당, 제물진두(순교터)성지, 갑곶성지, 강화성당,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황사영 백서'를 써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돼 처형당한 황사영 생가터, 천주교인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됐던 관청리 형방 등이 있다.

인천 천주교의 역사를 담은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이 지난달 17일 문을 열었다. 역사관은 1800년대 초부터 인천 시민과 함께해온 천주교의 발자취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역사관(지상 3층, 연면적 970.2㎡ 규모)은 인천의 첫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에 있는 옛 주교관을 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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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초부터 인천 시민과 함께해온 인천 천주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이 지난달 17일 문을 열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과거 주교들이 생활하던 답동성당 옛 주교관을 보수해 역사관을 만들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3~5전시실, 1960년 이후 대중과 함께한 '운동사' 다뤄
인천서 교육사업 공헌한 '장기빈 선생 일가' 특별관도
"신자뿐 아닌 시민들에게 훌륭한 역사 전달 공간으로"

 

지난 13일 오후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을 둘러봤다. 이곳은 18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의 인천 천주교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7개 전시실로 구성돼 있었다.

1전시실에 들어서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게 됐습니다. 이제 나를 위해 불멸의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金大建·1821~1846) 신부가 남긴 말이다.

김대건 신부는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난 1846년 백령도와 연평도 해역 인근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중국 어선을 이용해 서양 성직자들이 국내에 잠입할 수 있는 해로(海路)를 개척하다가 백령도 인근의 순위도(巡威島)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1전시실에는 천주교가 종교로 인정받기 이전 시기 순교한 교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신유박해 당시 참수당한 이승훈, '가톨릭 신앙의 증거자'로 불리는 '박순집(朴順集·1830~1911)' 등이 있었다. 강화도 출신인 박순집은 천주교 박해 때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교회 법정에 나와 박해로 숨진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한 인물이다.

이곳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할 때 사용하던 '형구돌'도 전시돼 있다. 형구돌은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에 세워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 구멍에서 이를 잡아당겨 죽이는 잔혹한 교수형 도구다. 역사관이 세워진 소식을 접하고 이를 보관하고 있던 고불선원(충북 충주시) 석암 스님이 흔쾌히 기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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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 정윤정 학예사가 인천의 첫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 모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3전시실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던 인천 시민에게 헌신한 성직자들의 사료가 전시돼 있다.

'푸른 눈의 프랑스 신부' 전학준(全學俊·1873~1947) 신부는 인천교구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전학준 신부는 박문학교를 설립하고 해성보육원과 해성병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미국인 최분도(1932~2001) 신부는 인천에서 30년, 이 가운데 덕적도 등 섬에서 14년을 머물렀다. 낡은 미군함정을 병원선으로 개조해 의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김 양식 방법을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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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성당의 역사와 함께한 제대.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 페이스북 캡처

3~5전시실에는 1960년 이후 민주화와 노동 운동 과정에서 인천 시민들과 함께한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1965~1968년에 강화도에서 발생한 '심도직물 사건'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1965년 9월 강화성당에 부임한 미국인 전미카엘(1929~1989) 신부는 밤샘 작업에 시달리는 여공들의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의 취임 이후 강화성당에는 심도직물 여공들이 참여하는 가톨릭 노동청년회(가노청)가 만들어졌고, 1967년 5월14일에는 심도직물에 처음으로 300명이 참여하는 노조가 탄생했다.

이듬해 심도직물 사측은 '무단결근'을 이유로 당시 노조 박분양 분회장을 해고했다. 또 심도직물을 비롯한 강화도에 있는 21개 직물회사는 '가노청 회원을 절대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하기도 했다.

주교단은 1968년 2월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를 지지했다. 결국, 심도직물이 속한 강화 직물업자협회는 가노청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국내 최초로 '노동사목'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73년 준공된 6층 규모의 인천가톨릭회관은 유신헌법 반대운동, 5·3민주항쟁, 6월민주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까지 시민들과 노동·사회운동단체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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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초대교구장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의 주교좌.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 페이스북 캡처

6전시실에는 초대 인천 교구장을 지낸 나길모(1926~2020) 주교와 최기산(1946~2016) 2대 교구장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장소는 나길모 주교와 최기산 주교가 실제 생활하던 장소라고 한다. 특별전시관에는 '장기빈(1874~1959)' 선생 일가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장기빈 선생은 인천 근대 계몽운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고, 천주교 인천교구에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별전시관에는 장기빈 선생의 아들인 장면(1899~1966) 박사 등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층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기해박해(己亥迫害)' 당시 순교한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1797~1839)' 주교, '피에르 모방(1803~1839)' 신부, '샤스탕 야고보(1803~1839)' 신부의 유해다.

앙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야고보 신부는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1830년대 조선을 찾아 열성적으로 목회 활동을 벌인 선구자들이다. 전시된 유물을 모두 둘러보고 이들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드리며 관람을 정리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고 역사관 관계자는 설명했다.

총 108점의 유물과 서한, 공문서 등을 보관하고 있는 역사관은 코로나19 영향으로 현재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관람 인원을 20명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주 3차례(화·금·일)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고 있으며, 사전에 예약한 사람만 역사관을 둘러볼 수 있다.

역사관 정윤정 학예사는 "역사관은 천주교 인천교구가 신앙생활로서 시민들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알려주는 좋은 장소"라며 "역사관이 인천지역 천주교 문화유산을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인천 시민에게도 훌륭한 역사를 전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