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발발후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 조성… 수만명 '강제 노역'
해방직후 미군이 접수… 남한내 물자 공급·휴전후 포로수용소로
1990년대 인천 지역사회 '반환 촉구' 인간 띠 잇기 등 폭넓은 참여
인천 부평미군기지 '캠프 마켓'은 남북한·일본·미국·중국의 동아시아 전쟁사가 집약된 공간이다.
다른 지역 주한미군기지보다 광범위하고 국제적인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반환된 캠프 마켓을 활용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이기도 하다.
■ 식민지 아픔 서린 공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일본은 서울과 인천항을 잇는 경인철도의 중간이면서 드넓은 지대인 부부평평야에 한반도에서 가장 큰 330만㎡ 규모의 군수공장인 육군조병창을 조성했다. 1939년 공사를 시작해 1941년 5월 문을 연 부평 조병창은 평양의 조병창까지 관할했다. → 표 참조
조병창에서는 소총, 탄약, 포탄 등 일본 육군이 전쟁에서 사용할 각종 무기가 생산됐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물자를 공출해 녹여냈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은 중국 송·원·명대에 만든 3개의 철제 범종을 유물로 갖고 있는데, 일제가 조병창으로 공출했다가 1945년 패망 후 버리고 간 중국 종을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인 석남 이경성(1919~2009) 선생이 가져왔다.
이 시기 성인은 물론 학생과 어린 여성까지 수만명이 강제로 동원돼 조병창과 주변 하청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캠프 마켓 앞 부평공원에는 '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져 조병창의 강제동원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조병창에 위장 취업해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 한국전쟁과 애스컴시티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부평 조병창을 접수했다.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은 미군 입장에서도 군수보급기지로 최적지였다.
조병창은 제24군단 예하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 일명 '애스컴'(ASCOM)으로 재편됐다. 남한으로 들어오는 거의 모든 미군 물자는 인천항에서 애스컴을 거쳐 전국 미군기지로 수송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장한 부평미군기지는 하나의 도시를 이룰 만큼 크다 해서 '애스컴시티'로 불렸다. 휴전 직후 인근에 반공포로수용소가 설치됐는데, 반공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부평미군기지에는 보급창,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수십 개의 단위부대가 주둔했다. 그 중 하나가 캠프 마켓이다.
미군기지로 인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경제권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기지촌이 생기고 미군 범죄가 끊이질 않는 등 어두운 면도 컸다.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상당수 미군부대가 떠난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 반환 과정도 역사
부평미군기지 반환 과정은 시민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인천 지역사회에서 미군기지 반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96년 지역 시민단체들이 캠프 마켓을 둘러싸는 '인간 띠 잇기' 행사를 추진하다 경찰의 해산으로 무산됐으나, 2000년과 2001년 시민 1천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다시 열린 '띠 잇기'가 성공했다.
지역 34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우리 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가 발족해 반환 운동이 본격화했고, 시민회의는 매주 집회를 열어 4개월 만에 5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공감대를 확산했다.
캠프 마켓은 주한미군기지 가운데 처음으로 국내 기준치가 없는 발암 물질인 '다이옥신'까지 정화하는 미군기지다. 이 또한 30년 가까이 지속한 시민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