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경제, 교육, 의료 등과 마찬가지로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편차가 크다. 서울이 수도의 위상을 한참 뛰어넘어 '서울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배경에는 서울과 비서울 지역 간 문화적 격차도 존재한다. '문화에도 분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한정된 인력과 자원 속에서도 경기도와 도내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은 '예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설립 근거가 되는 조례 대부분은 예술단 설치 목적을 '시민정서의 함양과 지방문화 예술의 창달'에 두고 있다. 문화 복지 서비스를 강화해 더욱 살기 좋은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목적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자체 예술단 소속 예술노동자들은 '우리가 과연 꼭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저임금과 고용 불안, 비민주적 예술단 운영 방식 등과 관련한 불만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만큼 쌓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지자체를 불문하고 예술단 내 여러 갈등이 터져 나오는 원인 등을 짚어본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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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열린 용인시립합창단 정기연주회. /용인문화재단 제공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이강선(가명·30대)씨는 지난 2017년 8월 베이스 파트 단원으로 용인시립합창단에 입단했다. 그는 합창단 단원이 되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직장 생활을 했다고 한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를 제작한 적도 있고, 병원 건강검진센터에서 탈의실을 관리하는 업무도 했었다. 간간이 오페라 공연에 서며 노래에 대한 꿈을 이어가던 그였다.

용인시립합창단은 이런 그에게 희망을 준 직장이었다. 자신의 예술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의 표현대로 '노래하는 직장'에 꼭 들어맞는 곳이었다.

강선씨의 부푼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물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합창단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입단 초기 그는 최저 시급을 받았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지 않는 비상임 단원인 데다, 하루 근무 시간도 3시간에 불과했던 터라 그가 실제 손에 쥐는 급여는 몇십만원 남짓이었다.

현재 용인시립합창단은 단원들에게 매 출근 시 일급 1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일주일에 3번 출근하니, 한 달 급여는 120만원이다. 합창단에서 받는 돈만 가지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웠던 강선씨는 부업을 찾아 나섰다.

 

주 3일·일급 10만원 '생계 절박'… 부업포함 월수입 177만원 불과

 

그는 주말에 배달 앱 라이더들의 업무를 상담해주는 콜센터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저녁 7시30분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상담사로 일해 받는 돈은 57만원. 이마저도 가정이 있는 그에게 부족한 금액이지만, 합창단 일정도 고려해야 해서 추가로 다른 일을 하긴 어려운 형편이라고 한다.

용인시립예술단 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 2017년 8월 합창단에 입단한 비상임 단원은 모두 76명이었다. 현재 남은 인원은 54명이다. 만 4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전체 인원 중 29%인 22명이 합창단을 떠났다.

이 중 절반가량은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다 스스로 퇴사를 했다는 게 노조 측 분석이다. 남은 절반 정도는 '평정'에 의한 해고를 당했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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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씨가 주말마다 출근하는 배달 앱 콜센터. 그는 라이더들의 업무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강선씨 제공

용인시립합창단은 1년에 한 번씩 단원들을 대상으로 노래 실력과 그동안의 근무태도 등을 평가하는 '평정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기준 점수에 미달하면 재계약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한순간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평가이기 때문에 평정 시기만 다가오면 합창단 분위기가 살얼음판으로 바뀐다고 현직 단원들은 전했다.

 

해마다 실력·근태 '평정' 살얼음… 비상임단원, 4년 안돼 29% 떠나
노조측 "절반 생계문제 호소하다 스스로 퇴사… 절반은 해고" 주장


한 소프라노 파트 단원은 "1년에 한 번씩 평정으로 단원을 계속 해고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며 "단원들 사이에서 서로 견제하고 갈등을 빚는 일이 많아져서 단원들 간 화합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용인문화재단 관계자는 "합창단 역량 개발에 대한 부분 때문에 1년 단위 계약을 했고, 평정 점수에 따라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현재 인원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3시간 근로를 했을 때, 10만원을 지급하고 있는데 시간 대비 금액으로 보면 큰 금액이다. 합창단일 뿐만 아니라 사전승인을 받으면 외부활동도 할 수 있고, 이를 제한하고 있지도 않다"고 설명했다. 

 

앞서 본 강선씨의 사례는 비단 그만의 특별한 사정이 아니었다. 어느 단원은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짬이 날 때마다 음식 배달 일을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단원은 학교로 긴급돌봄 수업에 나간다고 했다. 이들 역시 매년 재계약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호소했다. 그들의 요즘 고민은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였다.


그렇다면 이는 용인시립합창단원들만 겪고 있는 어려움일까.
 

경인일보는 지자체 예술단 소속 예술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지난달 18일부터 24일 사이 네이버 오피스 폼을 이용해 '경기도 지자체 예술단 노동 실태조사' 설문을 진행했다.

이번 설문에는 경기아트센터와 수원·성남·과천·안양·의정부·부천·용인·파주·남양주·광명·시흥·고양·안산·양주시립예술단 등 15개 예술단 소속 단원 507명이 참여했다.


 

경기도내 15곳 소속자 507명 설문… 불만족 42.4%·매우 불만족 16.2%
임금 71.6% '압도적 1위' 고용불안 46.2%·불합리한 평정 44.4% 뒤이어

 

이번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예술단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42.4%(215명)는 '불만족'하다고 답했다. '매우 불만족'을 선택한 16.2%(82명)를 포함하면 과반수가 현재 예술단 상황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반대로 '만족'과 '매우 만족'을 꼽은 비율은 각각 11.4%(58명)와 2.4%(12명)에 그쳤다. 불만족 혹은 매우 불만족을 선택한 응답자를 대상으로 불만족한 이유를 물은 결과(복수응답), '낮은 임금'이 71.6%(363명)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고용 불안정(46.2%)'과 '불합리한 평정 제도(44.4%)' 등이 뒤를 이었다.

"저임금으로 인한 택배, 공장,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며 단원들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원들이 예술단 일로만 살 수 있게끔 임금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질 좋은 공연을 시민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40대 합창단 비상임 단원)

"음악인으로서 고정급여를 받는 소속을 가지기 위해 270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음에도, 매해 평정 제도로 단원들이 해고당하는 철저한 갑을 관계의 조직입니다. 초반에는 비상임 단원이라고 계약서조차 써주지 않는 일용직과 같은 고용형태로 5년 이상을 근무했습니다."(30대 합창단 비상임 단원)

이처럼 낮은 임금 수준이 응답자들의 직장 만족도를 떨어트리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가운데, 응답자 중 40% 이상은 매달 200만원 미만의 급여(실수령액 기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매달 100만원 미만의 급여를 받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0.5%(104명)에 달했다. '200만원 이상 300만원 미만'을 선택한 응답자가 44.6%(226명)로 가장 많았고, '400만원 이상'의 급여를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2명이었다.

예술단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충분하지 않아 예술단 활동 이외 '겸직'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43.2%(219명)였다. '강사·강의'를 하고 있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25.8%(131명)로 가장 높았다. 기타를 제외하면 '자영업(3.9%)', '노동노무직(2.6%)', '사무직(1.4%)' 등의 순을 보였다.

통상 정규직 개념인 상임 단원은 일부 사정을 제외하면 겸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인 터라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낮은 급여가 어쩔 수 없으면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여 다른 일들로 수입을 충당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200만원 남짓 되는 급여로 퇴근 시간도 고정해 놓고 겸직이나 다른 활동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4~5인 가정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30대 합창단 상임 단원) 

 

 

10명 중 9명 '운영 못한다' 강한 불신… '예술노동 대한 이해 부족' 불만 

개별연습 근무제외 '공짜노동' 생각-지자체 "시간대비 높은 임금" 괴리

 

응답자들은 예술단 관리 주체인 지자체와 문화재단에 강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자체 혹은 재단이 예술단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응답자 10명 중 9명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그 이유(복수응답)로는 80.3%(407명)가 '예술노동에 대한 이해 부족'을 꼽았다.

예술단 운영 방식을 놓고 지자체와 단원 간 입장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인데, 일례로 '근무시간'을 들 수 있다. 직장인처럼 '주5일 출근, 하루 8시간 근무'를 하는 단원은 극히 드물다.

실제로 이번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41.6%(211명)는 '주 20시간 이상 30시간 미만'을 근무한다고 했다. 다만, 이 근무시간에는 '개별 연습' 시간이 제외되어 있다고 한다. 양질의 공연을 위해 개별 연습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데, 정작 근무시간에는 포함되지 않아 '공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게 단원들의 생각이다.

반면 관리 주체인 지자체들은 대체로 단원들이 근무시간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양측의 괴리가 작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밖에 응답자들은 '단원과의 소통 부재(70.2%)', '투자 등 재정적 지원 부족(60.7%)', '비민주적인 예술단 운영 방식(51.7%)' 등을 이유로 택했다. → 그래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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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이나 시립처럼 지자체가 운영·관리하는 단체는 예술단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물며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2년마다 한 번씩 자리를 옮깁니다. 좀 더 예술가들의 생활과 환경을 이해할 수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예술단체를 운영·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40대 오케스트라 상임 단원)

한편 이번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는 상임 단원이 67.1%, 비상임 단원이 32%였다. 응답자의 소속은 합창단(47.%), 오케스트라(29.4%), 국악단(14.4%), 극단(4.5%), 무용단(3.7%) 등이었다.

응답자의 연령대는 40대(41.6%), 30대(35.9%), 50대(17.6%), 20대(3.9%), 60대 이상(0.6%)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근속기간은 '5년 이상 10년 미만(22.9%)'이 가장 많았고, '20년 이상(21.7%)', '15년 이상 20년 미만(20.5%)' 등이 뒤를 이었다. 남녀 성비는 각각 39.6%와 59.8%였다. *응답 없음 제외.

/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