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용(1855~1928) 목사가 수첩에 남긴 창가집(1909~1911년 필사)은 일제의 강제병합 직전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불렸던 창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는 평가다.

개화기부터 널리 불린 창가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대 이후 점차 사라졌다. 국내에는 간행물로 전하는 창가집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해외에서 펴낸 북간도의 '최신창가집 부악전'(1914년)과 하와이의 '애국창가'(1916년)가 온전히 전하는 우리나라 대표적 창가집으로 꼽히는 이유다.

창가 등 항일음악을 연구하는 반혜성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교수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면서 국내에는 간행물로 남은 창가집이 거의 없다"며 "개인 필사로 남은 '손승용 수진본 창가집'은 현존하는 창가집 중 수록곡이 가장 많을 뿐 아니라 해외 대표적 창가집과의 연관성으로 재조명할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민족말살정책'에 대부분 사라져
현존 창가집중 수록곡 가장 많아
해외 창가집 연관성 재조명 필요
인천 연관 지역사적 가치도 높아

반혜성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 '손승용 수진본(袖珍本) 창가집의 특징과 가치'에서 분석한 창가집 수록곡 55곡(원본 57곡 추정) 가사의 핵심 어휘는 '단군', '사천년 조국', '대한제국', '무궁화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 등이다. 또 반 교수는 문장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로 '독립의 사상'과 '애국성'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교육계몽과 찬송에 관한 노래도 수록됐다.

손승용 목사의 창가집은 이후 나온 북간도 '최신창가집 부악전', 하와이 '애국창가'와 수록곡이 30곡 겹친다. 단순히 수록곡이 겹친다는 유사성뿐 아니라 두 권의 해외 창가집 제작 배경인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영화학교', '강화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감리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한국 최초 해외 파견 선교사 홍승하(1863~1918)' 등이 손승용 목사의 행적과 단단히 연결돼 있다. 인천과 연관이 깊다는 점에서 지역사적 가치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손승용 목사의 작은 수첩에 담긴 창가집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해외 독립운동 전진기지였던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요의 씨앗을 뿌리고, 고된 노동에 시달린 한인 하와이 이민자들이 민족의식을 지켜내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반혜성 교수는 "손승용은 국권이 위협받던 시대적 위기감에서 애국의 정신을 강조하는 개화사상을 갖게 됐고, 여기에 신앙의 힘을 보태 스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다"며 "비록 개인이 필사한 것이지만, 국권 피탈의 과정을 바라보며 우러나는 애국심과 독립의 염원을 기록한 시대의 대표적 결과물이 손승용 창가집"이라고 강조했다.

 

손승용 목사 유족이 보관하고 있었던 창가집은 2004년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가 발굴했고, 2006년 경인일보 연중기획 시리즈 '인천인물 100人'(2006년 12월14일자 14면 보도)을 통해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손승용 평전을 쓰고 있는 이성진 대표는 "손승용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기자로 독립신문에서 1896년 창간 때부터 폐간 때까지 활동했다"며 "손승용 창가집의 가치가 새로 조명되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손 목사에 대한 후속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손승용 목사는]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 아펜젤러에게 세례 받아 


1234.jpg
1900년대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손승용 목사 사진. 인천으로 내려오기 직전으로 추측된다. /경인일보DB

 

손승용 목사는 1855년 전남 나주 출생으로 고향에서 한문을 가르치다 개화사상을 접하고 30대에 서울로 상경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한 그는 같은 해 서재필(1864~1951)이 창간한 독립신문 기자로 1899년 폐간 때까지 활동했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 기자였다.

1900년 정동제일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이후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황해도 연안교회, 강화잠두교회(현 강화중앙감리교회) 등지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제물포교회에서는 영화학당(현 영화초교) 교사를 맡았고, 1907~1910년 강화잠두교회 시절 합일학교(현 합일초교)를 비롯해 강화 지역에서 여러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계몽운동에 힘썼다.

강화를 떠난 손승용 목사는 경기도 수원, 충남 공주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갔고 1920년 서울에서 사제로서 역할을 마친다. 1928년 전남 함평에서 74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21112101000787100038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