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면용2.jpg

법원은 장애인과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가 법원의 서비스를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했다.

법원을 찾는 장애인과 외국인, 북한이탈주민 등에게 편의시설과 사법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전국 20여개 법원에 설치한 '사법접근센터'가 대표적인 예다.

또한,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으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수어통역 비용을 지원하거나 시각장애인에게 점자판결문을 제공하는 등의 법원 사례를 보면 제도적인 미비점은 상당 부분 보완한 모습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법원이 구축한 다양한 지원 제도를 사회적 약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다. 당사자들이 정작 서비스 이용에 불편함을 겪고 있다면 법원이 자랑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 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통·번역인가
44444.jpg
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권리는 종종 법원의 '편의주의'와 충돌한다. 자의든 타의든 법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와 법원의 편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법시스템의 불친절을 지적한다.

'통역·번역 외국인 사건 처리 예규'는 외국인 형사 피고인의 '절차상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 등을 규정한' 재판예규다.

재판을 받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알지 못해도 스스로의 변호권을 충실히 행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규칙의 하나다. 예규에 따르면 외국인 형사 피고인은 자국의 언어로 번역된 공소장을 받을 수 있고, 재판 중에 통역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는 약식명령이나 즉결심판에는 번역 서비스가 지원되지 않는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추후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등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외국인 형사 피고인이 재판 도중에 통역을 지원받는 건 당연한 권리지만, 그 방식은 재판부의 재량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증인 등의 발언을 모두 순차적으로 피고인에게 통역해 재판의 이해를 돕는 게 정석적인 방법임에도 시간상의 이유로 일부 발언만 통역하게 하는 재판부도 있다.

법원의 편의에 밀려 재판 당사자가 소외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올 초부터 한국외국인법률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양태정 변호사는 "변호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처음 법원 민원실에 가면 어떤 양식을 써야 하는지 혼동이 온다. 비법조인 중에서도 외국인들은 관련 외국어로 된 서류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외국인이 질문하면 그냥 법률구조공단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통역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법원이 좀 더 신경 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전한 걸림돌 판결
111111.jpg
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올해로 6년째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노태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은 올해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사에서 "한 편의 판결문은 그저 종이 몇 장이지만 그 속에는 한 장애인의 삶이 있다"며 "흩어져 있는 판결들을 따라가다 보면 장애인 인권의 현주소가 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장애인이 법원을 이용하는 데 물리적 장벽은 완벽할 순 없지만 많이 사라졌다. 법원은 지난해 '장애인 사법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 개정판을 발간하는 등 개선 노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법원의 판단이 장애인 등 사법 약자가 겪는 불평등 실태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올해는 군 복무 중 청각장애를 입은 원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입증 책임을 요구하며 보훈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은 사례와 문턱, 손잡이, 점형블록 등을 장애인등편의법 상의 건축물로 볼 수 없어 지자체가 편의시설을 미설치한 건축사에 부과한 벌점을 취소한 사례 등이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특히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특정 유형의 장애인에게만 장애인용 콜택시를 이용하게끔 한 성남시의 조례가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는데,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차별행위로 인정해 원심판결을 뒤집기도 했다.

표경민 변호사는 이 사건 1심 판결에 대한 걸림돌 판결 선정 의견에서 "이동권은 장애 인권의 중요한 화두"라며 "이 판결은 장애인에게 발생한 이동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결론에 이른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상식을 기대한다

55555.jpg
광교법조타운의 모습. /연합뉴스

법원은 '소송구조'라는 제도를 통해 소송비용을 지출할 자금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돈이 없는 사람도 헌법이 보장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소송구조를 신청하려면 일단 신청인이 자력으로 소송을 진행할 여건이 안 된다는 점과 법원이 판단하기에 신청인의 '승소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경제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제시한 두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소송구조의 조력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법원의 '인색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소송구조 사업에 국가 예산을 편성 받고, 이를 집행하는 법원 입장에서 구태여 돈을 아끼면서 사업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소송구조 인용률은 불과 몇 년 전까지 50%대에 머물렀다.

올해 법원의 비상식적인 행태를 꼬집는 내용의 책 '불량 판결문'을 낸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는 "소송구조는 당사자의 권리인데, 법원이 굉장히 시혜적으로 베푸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소송구조를 신청했는데, 절차적으로 너무 느린 경우가 많고, 항소하면 소송구조를 해줬는데 항소까지 했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최 변호사는 불량 판결문이라는 책에서 법원 조직의 불친절한 절차와 태도부터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까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누구도 쉬이 입에 담지 못했던 법원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상식적인 수준의 서비스를 바라는데, 법원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법관의 독립이나 존중은 그들이 내린 판결의 내용인데, 마치 절차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법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소액사건인데도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는 좋은 판사님들도 있고, 책 잘 봤다고 연락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 마음도 친절하지 못한 서비스를 하면서 '불편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나의 법정'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법원을 찾는 시민들을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 법률 용어 설명 ('국회 법제실 알기 쉬운 법률용어 2020' '대법원 법조출입기자를 위한 알기 쉬운 법률용어 2015 개정판' 발췌)

추후지정=기일을 변경, 연기 또는 속행하면서 다음 기일을 지정하지 않는 경우

제척기간=법률이 정한 권리행사기간

부진정=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구상권=타인이 부담해야 할 의무에 관해 대신 출연한 자가 그 타인에 대해 상환을 구하는 권리

가집행=신속하고 잠정적인 권리 실현을 위해 판결 확정 전 집행하는 경우

사해행위=채권자가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 채무자가 재산을 감소시키는 행위

약식명령=공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원칙적으로 서면심리만으로 피고인에게 벌금·과료를 과하는 간이 형사절차

누범가중=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 집행을 종료하거나 면제받은 후 3년 이내 금고 이상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그 죄에 정한 형의 장기의 2배까지 가중하는 조처

작량감경=법원이 피고인 등 사정을 고려해 형을 가볍게 하는 것

몰수=기소된 범죄 행위 관련 물건의 소유권을 박탈해 국고에 귀속하는 처분 추징 몰수 대상물 전부 또는 일부가 몰수하기 어려울 때 몰수에 갈음해 그 금액의 납부를 명하는 처분

면소=발생한 형벌권이 사후 일정한 사유로 소멸한 경우 선고하는 판결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메인썸네일.png

※기획취재팀

글 : 손성배, 배재흥 기자
사진 : 김금보·김도우 기자
편집 : 김동철, 장주석 차장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차장


2021112401000947900046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