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성(64)씨는 고향 부산을 떠나 30년째 전남 순천시 홍내동에서 약 6천612㎡ 규모의 오이 농사를 짓고 있다.
30년 전 김씨에게 순천 곳곳에 펼쳐진 오이밭은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경남에서는 오이를 쌈장에 찍어 먹거나 기껏해야 초무침 해먹는 게 다였는데, 순천에서는 오이가 날마다 밥상에 오르는 주식(主食)이었던 것이다.
김씨는 60년 역사를 지닌 오이작목반 '도사녹진회' 회장으로서 지난 8월까지 3년 임기를 마쳤다.
"순천 오이의 역사는 창호지와 대나무로 원예 시설을 만들던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을별 6개 작목반으로 이뤄진 도사녹진회는 전국적인 시설원예 모범조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도사녹진회 회원들은 영농철 품앗이를 하고 친환경 농업 협업, 후계농업인 육성 등을 함께하며 보다 빠르고 신선하게 순천 오이가 전국 소비자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낙안면 등서 300가구 재배… 지난해 228억 매출
순천만 해풍과 풍부한 일조량 덕 크고 당도 높아
전남 오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순천 오이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면 서운하다. 순천 안에서도 주산지가 6개 면지역으로 나뉘면서 '낙안 오이', '상사 오이', '풍덕동 오이' 등의 애칭을 갖는다. '외 거꾸로 먹어도 제 재미다'라는 옛말처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순천에서 오이를 키우는 농가는 300가구에 달한다. 지난 한 해 이들이 오이로 거둔 매출은 228억8천만원으로, 대부분 농가가 억대 매출 반열에 들었다.
지난해 순천 오이 생산량은 1만810t으로, 이의 55%가량은 낙안면에서 생산됐다. 재배면적도 전체 80㏊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지난해는 낙안면(5천897t)에 이어 도사동(3천18t), 상사면(830t), 풍덕동(484t), 별량면(327t), 황전면(254t) 순으로 오이 생산량이 많았다.
순천 오이는 서울 가락시장 등 주요 도매시장에서 월등하게 높은 시세를 받는다. 수확량이 줄어드는 겨울에는 10㎏당 최고 4만5천원까지 값이 매겨진다. 다른 지역 시세보다 1만원가량 높은 가격이다.
여름철 경기·강원지역에서 생산된 오이가 10㎏에 4천~5천원에 거래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순천 오이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순천 오이의 인기 비결은 맛과 크기에 있다. 순천만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다른 오이 상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당도가 있다.
10㎏ 한 상자에 50개가량이 들어가는 다른 상품과 달리 순천 오이는 크기가 큰 덕분에 40개 정도가 담긴다.
타지역 상품보다 1만원 가량 높은 가격에 거래
매년 5월2일 '오이데이'… 홍보·소비촉진 활발
취청오이로 보면 일반 상품 무게가 개당 240~250g이라면, 낙안에서 생산된 오이는 280g에서 300g까지 올라간다. 순천 오이의 70%가량은 청록색을 띠는 취청오이이며, 나머지는 연녹색 백다다기 오이이다. 순천 낙안면은 전국 최대 취청오이 주산지로 꼽힌다.
순천산 취청오이는 수도권 지역 식당, 백다다기 오이는 대형 사업장 구내식당이나 군 급식 재료로 주로 쓰인다. 백다다기 오이는 껍질이 부드러워 통째로 먹기도 한다.
순천에서는 8월 중순부터가 본격적인 오이 농사를 짓는 시기이다. 이때부터 퇴비, 비료를 주며 토양을 다지고,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온상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내어다 심는다. 모종을 심은 뒤 40~45일 정도 지나면 단단하게 속이 찬 오이를 수확할 수 있다.
수확은 대개 11월 초부터 시작한 뒤 5월에 끝나며, 길면 7월 초까지도 수확할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순천 농민들은 7~8마디 자라면 수확하는 관습과 달리 9~12마디 이상 자랄 때까지 기다린 뒤 수확하면서 최상의 품질을 만들어낸다.
순천 농가에서 중요한 날 가운데 하나는 매년 5월2일 '오이데이'이다. '오이데이' 주간에는 순천 오이를 널리 홍보하기 위한 홍보와 소비 촉진 행사가 열린다.
순천시는 오이를 고소득 작목으로 선정했다. 오이 농가의 고소득 창출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지난 2004년부터 75억원 예산을 투입해왔다.
이를 통해 재해에 강한 시설하우스와 스마트팜, 무인방제기, 관비 시스템을 새로 설치하거나 현대화했다. 안전성과 신선도를 갖춘 순천 오이는 서울과 대전, 광주, 진주 등 주요 도매시장을 통해 전국에 유통되고 있다.
■ 오이의 무한 변신, 어떻게 먹어도… 오! 해피
최근 '안주 맛집'으로 통하는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의 한 술집에서 오이 한 개를 통째로 넣은 '명란구이 샐러드'를 접했다. 가지런히 썰어놓은 오이 위에 명란 고명을 얹는 단순한 요리였는데, 20~30대 손님들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오이는 한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가 유행할 정도로 우울한 시절을 보냈다. 지난 2017년 개설된 이 페이지 이용객들은 오이 특유의 향과 식감을 싫어했는데, 심지어 오이비누까지도 멀리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때로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오이의 뛰어난 맛과 영양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뤄진 오이는 등산갈 때 챙겨야 할 간식으로 꼽힌다.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한 뒤에 오이에 함유된 무기질로 충전하는 것도 좋다.
오이는 체내 나트륨염과 노폐물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미용에도 자주 쓰인다. '오이를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오이 줄기에서 나오는 물도 피부를 곱게 한다.
90% 이상 수분 등산 필수 간식… 체내 노폐물 배출 효과도
소박이·초무침·냉국·장아찌 등 모든 요리 '팔방미인' 역할
오이는 산뜻하고 아삭아삭한 식감에 손질도 쉬워 모든 요리에서 팔방미인 역할을 한다.
여름 김치 '오이소박이'와 입맛을 돋우는 '오이 초무침', 갈증을 풀어주는 '오이 냉국', 파스타 절친 '오이 피클' 등은 사시사철 식탁에서 내려가는 법이 없다. 오이갑장과, 오이장아찌, 오이지 등 반찬으로 먹어도 좋고 오이 카나페와 오이 참치 초밥, 오이 단무지 초무침, 오이 말이, 오이 샐러드로도 만들 수 있다.
오이를 익혀 먹을 수도 있다. 순천에서는 오이와 무, 표고버섯에 소금간만 해서 맑은 장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오이 덕분에 국물이 시원하다.
6월이 지나 노랗게 늙은 '노각'으로 오이무름국을 끓이거나 무침, 나물로 먹기도 한다. 오이 특유의 식감은 유지하면서 묵직한 감칠맛을 더해 노각 오이만 찾는 미식가들이 많다.
오이를 고를 때는 녹색이 짙고 가시가 있는 걸 찾으면 된다. 탄력과 광택이 있고 굵기가 고른 상품이 좋다. 꼭지의 단면에 따라 신선도를 가늠할 수 있다. 냉장고에 보관할 때는 한꺼번에 넣지 말고 하나씩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면 싱싱함을 더 유지할 수 있다.
/광주일보=백희준기자,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