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지난달 국제산업보건학회(ICOH) 제16대 회장을 맡게 된 가천대 길병원 강성규(63)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의 다짐이다. 강 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서는 2번째로 국제산업보건학회를 이끌게 됐다. 임기는 오는 2024년까지다.
국제산업보건학회는 전 세계 노동자의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연구와 교육활동 등을 하는 산업안전보건분야 최고의 국제학술단체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세계보건기구(WHO)의 산재 예방 관련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한다.
짧은기간 산업화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오염방지시설… 전국 곳곳 공장 찾아다녀
1993년 제일화학 사망사고 조사해 석면 피해 입증 '직업성 암'으로 국내 첫 인정 받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경각심… 정부 산업별 재해원인 분석 사업주 과실 따져야
직업환경의학은 노동자 직업병은 물론, 산업재해, 환경성 질환 등을 진단·연구하는 학문이다. 급변하는 노동환경에 따라 건강문제가 전형적인 직업병이 아닌 업무 관련성 질환으로 바뀌는 데다, 산업재해와 관련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직업환경의학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연세대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친 강 교수는 담당교수의 추천으로 직업환경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89년 당시 근로복지공사 부설 직업병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는 직업병을 연구하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고 했다.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이뤄냈지만, 산업화의 명과 암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은 오염방지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직업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는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피해 규명을 위해 전국 곳곳에 있는 공장을 찾아다녔다.
강 교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직업병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조사했던 직업병 피해 노동자의 이름과 증세 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993년 경남 양산 '제일화학'에서 일했던 노동자 사망사고를 조사해 국내 최초로 석면 피해를 입증했다. 제일화학은 1969년부터 가동된 국내 최초 석면 방직공장이었다.

강 교수는 공장 노동자였던 50대 여성이 악성중피종으로 사망한 사고를 통해 석면과 질병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데 집중했다. 국내에서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은 첫 사례였다. 현재는 석면이 유해물질로 관리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일화학 노동자들은 석면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석면가루가 뭉텅이로 날아다니는 공간에서 일했다고 한다. 노동자들 다수가 석면 피해로 추정되는 폐암과 악성중피종, 석면폐증을 앓다가 목숨을 잃은 사실도 뒤늦게 확인됐다.
강 교수는 "환자의 부검을 맡았던 의사를 만나 몇 시간 동안 설득해서 석면으로 인한 산업재해를 규명할 수 있는 조직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석면 피해를 검증할 수 있는 장비가 없어 일본에 분석을 의뢰하고, 피해자 조직에서 석면이 검출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1997년 광주 타이어공장에서 사용하는 벤젠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는 타이어공장 노동환경을 측정하고, 3교대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전수 조사해 병인과 업무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 외에도 경기도 시흥 신발공장에서 '시너'를 사용한 노동자가 뇌 손상을 입게 된 사례를 조사해 직업병 연관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당시 국제학회에서 연구사례를 발표했었는데 한 덴마크 연구자가 '한국에서는 다양한 직업병을 연구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웃지 못할 농담을 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선 다양한 사례가 발생했다"며 "직업병은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가 쉽지 않아 확률적으로 얼마나 더 연관이 있는지 역학조사를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직업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고, 인식이 높아져 과거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강 교수는 현재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업안전보건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중대재해 예방 대책 등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는데, 강 교수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작업 현장 운영체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재해 발생 책임을 현장통제권자에게 지워야 한다는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이는 지난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강 교수는 "현장통제권자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산업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며 "서울지하철 구의역 사고에서도 현장통제권자가 협력 업체 노동자의 업무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열차 운영 시간 조정, 인력 증원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사업주가 산업재해 발생 시 구속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됐으니 환기 효과는 충분하다"면서도 "정부가 산업별로 재해 원인을 분석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을 정립하고, 이를 어긴 사업주의 과실을 명확히 따질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안전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지원 방안을 연구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그는 "작업장 환경과 유해 요인을 분석하고, 노동 환경이 바뀌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유해 요인과 문제를 찾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겠다"며 "노동자 안전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글/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강성규 교수는?
▲ 1959년 출생
▲ 대전고, 충남대 의학과 졸업, 동대학원 의학 석·박사
▲ 2009~2011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
▲ 2012~2014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서울지역본부장
▲ 2018~2021년 국제산업보건학회 부회장
▲ 2020년~ 가천대 길병원 국민검진센터 소장
▲ 2021년~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업안전보건위원장
▲ 2022년~ 국제산업보건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