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단 30년을 맞은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을 이끌고 있는 서광일(56) 대표는 1987년 6월 인천 부평에 있는 십정동의 한 성당 풍물반 강좌에서 국악기를 처음 접했다.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30년 넘도록 국악기를 손에 쥐고 살아갈 줄은 전혀 몰랐단다. 당시 경동산업 소속 노동자였던 서 대표는 풍물반에서 대학생 예닐곱 명과 뒤섞여 풍물을 배웠다.
"땅도 땅도 내 땅이다. 조선 땅도 내 땅이다"를 입으로 수차례 반복해 따라하며 배운 자진모리장단의 입장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그렇게 처음 국악기를 만져봤다. 오른손에 '열채'를, 왼손에 '궁채'를 쥐고 그날 어설프게 배운 입장단에 맞춰 장구를 두드려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고 뿌듯했다.
"장구를 처음 두드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풍물이 조합원들을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뿐이었죠. 7년 뒤인 1992년 제가 잔치마당을 창단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앞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겠구나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요."
# 노동운동에서 문화운동으로
집안형편 나빠져 중학교 겨우 졸업 '상경'
무료야학 통해 검정고시 '전태일 평전'도
몸담았던 노동단체 해체후 잔치마당 창단
풍물 강좌와 공연… 전통혼례사업도 병행
부평풍물대축제와 성장 500명 길놀이 장관
여수 돌산도 멸치잡이 '선주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만 해도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그러다 새롭게 시작한 아버지의 배 사업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 집안 형편이 나빠졌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어린 나이에 학비를 벌러 상경했다. 1년 동안 왕십리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아서 여수로 돌아왔지만, 가정 형편은 그대로였다.
"서울로 올라갈 때와 비교해 집안 형편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거예요. 우연히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봤는데, 그냥 모아놓은 등록금을 다 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현재 한국폴리텍대학교의 전신인 광주직업훈련원을 졸업 후 1985년 '주안 6공단'에 있는 한 병역특례업체에 취업했다. 서 대표와 인천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취직하다 보니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공단 입구의 한 교회 지하에서 열린 '무료 야학'에서 대학생 형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 형들은 교과목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도 알려줬다고 한다. 전태일 평전도 그때 만났고, 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가 몸담았던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은 1992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해체되고 그도 노동운동을 접었다. 당시 서 대표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풍물'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인사연 해체와 동시에 사무실을 인수해 함께 풍물패 활동을 하던 동료들과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을 창단했다. 노동운동이 아닌 풍물로 문화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잔치마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풍물 강좌와 공연을 간간이 이어갔다. 하지만 배가 고팠다.
그는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려면 다른 것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풍물로 결혼식을 축복해주는 전통혼례사업을 병행했다. 당시 그가 시작한 전통혼례 이벤트는 지역 사회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현재까지 500여 쌍의 부부가 이벤트를 이용했다.
잔치마당의 성장은 부평풍물대축제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평풍물대축제는 삼산택지개발로 농지가 사라질 처지에 놓인 원주민 30여명이 옛날처럼 대동제를 열고 싶다며 풍물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열리고 있는 축제다.
삼산동 주민들은 6개월 동안 풍물을 배웠고 1996년 마을에서 한바탕 대동제를 열었다. 1997년 첫 축제 당시 부평의 21개 행정동은 모든 동마다 풍물단을 조직했고, 잔치마당의 주도로 모두 500명이 풍물을 배웠다. 이들은 축제 개막식 길놀이에서 첫선을 보였다.
"부평 백운공원부터 신트리공원까지 500여명이 걸어가며 풍물을 연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어요. 개막식 공연을 맡은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풍물패를 보며 대단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죠."
# '생존' 과제… 늘 새로운 것 시도
상설 전용극장 마련 '국악 대중화'에 노력
인천 문화예술분야 1호 사회적기업 인증도
폐국악기 예술작품으로 디자인 '온고작신'
'올바른 쓰레기 배출' 어린이 국악극 활동
인천아리랑 논문 국립국악원 '우수상' 받아
문화예술 단체를 운영해야 하는 서 대표에게 '생존'은 늘 지상 과제였다. 때문에 잔치마당과 서 대표는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익숙하다.
2004년 잔치마당은 상설 국악전용극장을 꾸며 관객을 찾아 나섰다. 잔치마당의 고유 레퍼토리 공연은 물론 국악 명인과 명창의 무대를 꾸준히 열며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잔치마당에는 인천의 문화예술분야 1호 사회적기업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자생력'을 얻기 위해 잔치마당은 2010년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예술분야 1호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서 대표는 잔치마당을 후원하는 기업을 발굴하고 '파트너십'을 맺는데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잔치마당은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수명이 짧은 폐국악기를 예술작품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온고작신(溫故作新)' 활동은 잘 알려져 있다.
또 올바른 쓰레기 분리배출 방법을 알려주는 어린이 국악극이자, 동화책으로도 출판된 '동동마을을 구해주세요!'는 학교와 기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꾸준히 배움에 정진한 서 대표는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에서 국악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는 국악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인천에서 전해 내려온 '인천 아리랑'을 발굴하고 이를 공연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 이력이 있는데,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 '인천 아리랑의 최초 기록과 선율에 관한 연구'는 지난해 국립국악원이 주는 우수학술상을 받았다. 이를 근간으로 한 박사논문을 발표하며 올해 초에는 학위도 받았다.
그는 풍물인으로서 걸어온 30여년의 길을 '끈기'라는 말로 요약했다.
"풍물이라는 예술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 누군가와 같이 즐겨야만 하는 예술이죠. 그래서 늘 '유통'을 고민했습니다. 늘 새로움을 추구했고 누군가 보게 만들려고 고민했어요. 끈기 때문에 이런 결과물이 나왔죠. 잔치마당은 앞으로 늘 사람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yong@kyeongin.com
■ 서광일 대표는?
▲1992년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창단
▲1997~2019부평풍물대축제 기획위원
▲2013년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2013~2014초당대학교 실용음악과 강사
▲2020~한국국악협회 이사
▲2020~2021년 어린이국악극 금다래꿍 제작
▲2021년 인천아리랑에 관한 논문으로 국립국악원 우수학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