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정직하다. 배신한 적이 없다. 먹은 만큼 더 움직일 수 있고 먹는 즉시 힘이 난다.
단순 포만감을 넘어 '살고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도 준다. 고기를 제아무리 먹어도 밥배가 따로 있다며 멋쩍게 웃음 짓는 한국인들이다. 수천 년을 주식으로 삼으며 체질화한 이유가 클 진데, 우리는 이를 밥심이라고도 표현한다.
소비자단체 평가서 6차례 우수브랜드 선정되는 등 '금값' 톡톡
같은 품종·부피·재배조건일 때 가장 무겁고 잘 썩지 않는 특징
한강하구 상류지역… 바닷바람·강바람 적절히 섞여 식감 최적
벼 익는 적정 온도·일교차, 고시히카리 자라기 좋은 토질·기후
기왕이면 맛있는 밥이 환영받는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걷히고 올라오는 촉촉한 향, 윤기 입혀진 투명한 쌀알과 입안 가득 들러붙는 찰기. 간장게장이나 제육볶음까지 갈 것도 없다. 정말 맛있는 밥은 간장과 고추장 등 원초적 찬만 곁들여도 뚝딱이다.같은 품종·부피·재배조건일 때 가장 무겁고 잘 썩지 않는 특징
한강하구 상류지역… 바닷바람·강바람 적절히 섞여 식감 최적
벼 익는 적정 온도·일교차, 고시히카리 자라기 좋은 토질·기후
전통의 곡창지대 김포에서는 이런 밥이 지금 이 시각 곳곳에서 지어지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 만찬서 귀빈들이 맛본 그 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10일 저녁. 미국 부통령과 전 일본 총리, 국내 5부 요인 등 각국 귀빈 160여 명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 모였다. 이날 만찬에는 전국의 특산물로 요리한 퓨전 한식이 차려졌다. 완도 전복과 통영 도미, 금산 인삼, 정선 곤드레, 제주 고사리 등 산해진미가 올라왔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저녁상을 풍요롭게 완성한 식재료는 '김포금쌀'이었다.
김포에서 생산되는 쌀에 이름 붙이는 김포금쌀은 원래 지역 최대 규모 농협인 신김포농협의 고유상표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하다가 김포시와 협의를 거쳐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통일됐다. 요즘에야 지자체에서 쌀 브랜드를 명명하는 게 추세가 됐지만 김포금쌀은 워낙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으며 '금값'을 톡톡히 해왔다.
한 소비자단체가 주관하는 '고품질 브랜드쌀' 평가에서 김포금쌀은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여섯 차례나 우수브랜드에 선정됐다. 쌀 품질향상 정책을 꾸준히 추진 중인 김포시는 관내 생산 우수 농산물에 대해 김포시장이 품질을 보증하는 '금빛나루 인증제도'를 도입해 소비자들과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김포금쌀의 핵심 특징은 같은 품종, 같은 재배 조건, 같은 부피일 때 제일 무겁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같은 품종, 같은 도정 조건, 같은 무게일 때 썩지 않고 제일 오래간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저온저장고가 생겨나기 전까지 오랜 세월 김포금쌀 선호현상은 독보적이었다.
밥맛 좋기로 정평이 난 고시히카리 품종도 경기도에서 김포시에 처음 도입했다. 국내 곡물학(농학) 박사 1호인 안학수 전 고려대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고시히카리가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토질과 기후는 김포를 이길 곳이 없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김포금쌀의 품질은 역사 속 문헌으로도, 또 연구결과로도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김포는 '토지가 평평하고 기름져 백성이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돼 있다. 김포에 형성된 '하해혼성충적토'(河海混成沖積土·하천과 바다의 퇴적작용을 동시에 받아 이뤄진 비옥토)는 쌀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천혜 조건이다.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이 참여한 '김포 이탄층 유적과 그 당시의 고환경 연구'에 의하면 김포 통진읍 가현리에서 발견된 탄화 볍씨는 5천300년~4천600년 전의 것으로 조사됐다.
기원전 2천년경 아시아 벼재배의 기원인 중국 양쯔강 중하류에서 해류를 타고 한강 하구인 김포지역으로 볍씨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고, 재배 여건이 유리한 김포 주변이 한반도 최초의 쌀 재배지였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임금님 수라상용으로 따로 진상된 일품쌀
김포는 벼농사에 이상적인 기후를 갖추고 있다. 해양성 기후로 벼가 한창 익어가는 8~9월의 일교차가 크다. 여름 한낮은 매우 덥고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쌀 육질이 단단해지고 타 지역보다 무게가 더 나간다. 벼가 익는 시기의 적정 기온은 21∼23℃인데 김포는 평균온도가 22℃이고, 이 시기 적정 일교차는 6~10℃인데 김포의 일교차는 10℃다.
한강하구에서도 비교적 상류에 위치, 바닷바람과 강바람이 교차하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라는 점도 김포금쌀 밥맛에 큰 몫을 한다.
벼는 바닷바람을 맞으면 억세고 강바람을 맞으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데, 김포는 바닷바람과 강바람이 적절히 섞이면서 최적의 식감을 낸다. 여기에 한강의 풍부한 유량은 과거부터 언제든 필요할 때 농업용수를 공급해줬다.
김포 농업인들의 남다른 자부심과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현시대에 이르러 여러 지역에서 조선왕실 납품 역사를 언급하고 있으나 수라상에 올라간 건 김포의 쌀이었다. 궁중 사람 전체가 소비하는 쌀이 아니라, 이와 별도로 들어간 임금님 밥상의 쌀은 김포에서 진상됐다.
김포 양촌읍 소재 신김포농협 미곡종합처리장은 벼 도정 및 쌀 저장과 관련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김포금쌀의 품질을 지켜왔다.
30년 넘게 쌀 품질 연구에 매진한 신현배 신김포농협RPC사업단장은 "낱알을 현미나 백미로 도정할 때 발생하는 먼지를 줄여보기 위해 구역마다 벽을 쳐서 분리했다"며 "신김포 미곡종합처리장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인데, 칸막이를 치니 먼지가 현저하게 줄었고 이제는 모든 미곡처리장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최고의 쌀을 생산·유통하는 이면에 최근의 쌀값 추락 사태는 농업인들에게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갈수록 쌀 소비가 감소하기도 하고, 소비자들 사이에 '쌀값은 당연히 싸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도 악재다.
신 단장은 "벼에서 쌀을 만드는 게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도정과 저장 방식의 미세한 차이로 천차만별의 쌀이 나올 수 있다. 똑같은 공산품도 어떤 기업이 생산하느냐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 걸 생각하면 된다"며 "비축분이 빠지지 않고 쌀이 제값을 받지 못해 농업인들의 시름이 깊지만 우리는 우수한 벼를 더 완벽한 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성·강기정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