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인천 남동구 남동유수지에는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검은색 긴 부리와 하얀 털을 지닌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저어새(천연기념물 205-1호)들이 유수지 내 인공섬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는 모습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동유수지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남동국가산업단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송도국제도시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도심 한복판이지만 저어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동유수지에 터를 잡는다.
이달 12일 오전 7시께 찾은 남동유수지에서는 올해 태어난 새끼 저어새들에게 가락지와 위치추적기를 부착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어린 저어새들을 포획하기 위해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소속 권인기 박사와 황종경 박사가 탄 모터보트가 저어새들의 서식지인 유수지 내 인공섬으로 향했다. 남동유수지에는 2개의 인공섬(큰 섬, 작은 섬)이 있는데, 이날 권 박사와 황 박사는 작은 섬으로 들어가 15마리의 새끼 저어새들을 포획했다.
새끼 저어새들을 포획망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건강 상태를 확인하던 황종경 박사가 가락지와 인공추적기를 부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황 박사는 "저어새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귀소본능이 강한데, 가락지와 인공추적기를 붙여두면 이듬해 봄에 돌아오는 저어새 개체 수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쉽다"며 "만일 가락지를 붙인 저어새들이 내년 봄에 보이지 않으면 남동유수지와 인천 갯벌의 생태계에 이상이 있다고 예상해볼 수 있는 만큼, 생태계의 건강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저어새는 전 세계에 약 5천여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약 80%인 4천여 마리가 매년 3월부터 11월 사이에 서해안을 따라 번식하는데, 인천에서는 옹진군 대연평도 인근의 무인도인 구지도와 육지에 있는 남동유수지가 저어새들의 주요 서식지다.
매년 봄이면 300~400마리 안팎의 저어새가 홍콩이나 대만에서 1천500㎞ 이상을 날아와 남동유수지에 둥지를 튼다.
송도 도심 한복판 남동유수지 인공섬에 '둥지'
가락지 등 부착 갯벌의 생태계 건강지표 확인
올해 400여마리 날아와 새끼 110여마리 부화
저어새가 남동유수지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건 2009년이었다고 한다. 저어새 두 쌍이 찾아온 유수지 내 작은 섬에서 6마리의 새끼 저어새가 알에서 부화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53마리, 2011년엔 80마리의 새끼 저어새가 태어나는 등 남동유수지에서 번식하는 개체 수가 늘었다.
올해도 지난 3월 4일 저어새 2마리가 남동유수지로 날아온 모습이 처음 관측된 뒤 이달까지 400여 마리의 저어새가 자리를 잡았고, 110여 마리의 새끼 저어새가 알에서 부화해 성장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저어새들의 '인천 살이'가 매년 순탄치만은 않았다. 너구리 등이 종종 인공섬을 습격해 저어새 알과 새끼 저어새를 먹이로 삼기 때문이다. 2018년 여름 남동유수지의 수위가 낮아진 틈을 타 너구리가 인공섬에 침입해 새끼 저어새가 46마리만 살아남았다.
앞서 2017년 233마리의 새끼 저어새가 성장해 남쪽으로 날아갔던 것과 비교하면 생존율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2019년에도 너구리의 습격이 이어져 70마리의 새끼 저어새 중 15마리만 목숨을 건졌다. 너구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작은 섬에는 울타리까지 설치됐다.
한동안 잠잠했던 너구리들은 지난달 저어새 둥지를 다시 습격했다. 이전과 달리 남동유수지에 물이 차 있었지만, 유수지 인근의 승기천에서 흘러내려 온 토사가 유수지에 쌓이면서 수심이 얕아진 탓에 너구리들이 섬까지 손쉽게 헤엄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번 습격으로 60여 마리의 새끼 저어새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위험을 느낀 저어새들이 내년 봄에 남동유수지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인공 작은섬에 울타리 설치했지만 너구리 습격
여름철 토양 '보툴리눔'균 서식활동에 치명적
7개 시민단체 제초작업 등 보호활동 정성 쏟아
저어새를 위협하는 건 너구리만이 아니다. 여름 장마와 폭염도 저어새들의 서식 활동을 위협한다. 장마철 폭우로 유수지 수위가 올라가면 인공섬 하단부에 자리 잡은 저어새 둥지들이 물에 잠겨 보금자리가 사라지는 경우가 생긴다.
장마가 지나고 폭염이 오면 유수지 내 토양에서 '보툴리눔(botulism)'이라는 세균이 저어새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보툴리눔은 여름철 흙 속의 산소농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면 증식해 독소를 내뿜는데, 긴 부리를 물속으로 넣어 먹이를 찾는 저어새가 보툴리눔 세균을 먹고 폐사하는 일이 지난해 여름에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저어새는 금개구리·점박이물범·흰발농게·대청부채 등과 함께 인천의 '깃대종'으로 선정됐다. 깃대종이란 '지역 생태계를 대표해 보호할 필요가 있으며, 생태적·지리적·사회적·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생물종'을 의미한다.
인천시는 지난해 남동유수지 인근에 저어새 생태 학습장을 조성해 시민과 학생들에게 저어새 관련 교육과 홍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인천도시철도 1호선 동막역에 깃대종 홍보공간을 설치하는 등 저어새 알리기 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인천지역 7개 환경단체가 구성한 시민단체 '저어새네트워크'도 저어새 보호 활동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2009년 저어새가 남동유수지에서 발견된 직후 만들어졌다. 저어새가 오기 전 인공섬에 들어가 둥지 재료를 쌓아두고, 인공섬에 풀이 자라 저어새들의 서식에 방해되면 제초 작업에 나선다.
저어새네트워크 김미은 사무국장은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저어새들이 남동유수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며 "남동유수지에 마련된 저어새 탐조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