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심수관 가문)는 424년 동안 단 한 번도
심씨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을 여러분 앞에 보고드립니다
심씨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을 여러분 앞에 보고드립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9일 오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선영을 찾은 일본 도예명가 15대 심수관(본명 심일휘·63)은 눈물을 흘리며 이같이 말했다. 424년 만의 심수관가 귀향 일정 3시간여 동안 의연함을 잃지 않던 그가 일순 복받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심수관'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청송심씨 심당길의 후손이 후대에 물려주는 이름이다. 이들은 일본 최고의 도예명가를 15대째 유지하며 한국식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뿌리를 찾을 수 없어 424년 동안 고향에 올 수가 없었다. 국내에는 족보가 남아 있었으나 일본으로 잡혀 왔다는 게 조상에게 죄스럽다며 본명인 '찬'을 버리고 아명인 '당길'로 살았기 때문이다. 청송심씨 족보에는 본명인 심찬의 곡산공파 가계도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었다.
15대 심수관이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건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계기가 됐다. 도자기 명인이자 주 가고시마 대한민국명예총영사 자격으로 취임식에 초청됐는데, 소식을 들은 심대평(전 충남도지사) 청송심씨 대종회장과 심재갑 곡산공 종회장 등이 그를 만나 이 사실을 알려줬다. 최근 심수관은 문화재청 초청으로 방한했다가 출국 일정을 미루고 이날 심당길의 아버지 심우인(1549~1611)과 할아버지인 청송심씨 10세조 곡산공 심수(1522~1580·황해도 곡산군수)의 묘를 참배했다.
1598년 정유재란때 일본 포로로 끌려간 심당길의 후손
후대 물려주는 이름 '심수관'… 日 도예명가 15대째 유지
한국식 이름 포기 않았지만 뿌리 못 찾아 고향 오지 못해
15대 심수관, 윤 대통령 취임식 초청 계기로 족보 알게 돼
후대 물려주는 이름 '심수관'… 日 도예명가 15대째 유지
한국식 이름 포기 않았지만 뿌리 못 찾아 고향 오지 못해
15대 심수관, 윤 대통령 취임식 초청 계기로 족보 알게 돼

아마 당길 할아버지가, 그리고 당길 할아버지의 부모(심우인)가
지금 가장 기뻐하고 있지 않겠느냐
지금 가장 기뻐하고 있지 않겠느냐
심수관은 오전 10시께 청송심씨 관계자들과 함께 김포시 양촌읍 학운리 소재 곡산공파 사당 학운재를 먼저 찾았다. 학운재 뒤편 야트막한 산에는 곡산공과 그의 1남 심우성, 2남 심우현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참배에 앞서 심수관은 학운재 내부에 크게 걸린 곡산공파 가계도를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봤다. '곡산공 5남 심우인'의 아들 심찬(심당길의 본명)을 발견한 그는 통역을 맡은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게 연신 질문을 하더니 "당길 할아버지가 의병장인 우신(곡산공의 3남) 아저씨와 함께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남원성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일본에 끌려갔다고 대대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또 "청송심씨는 10대 명문가에 속한다고 아버지께 들었다"고도 했다.
곡산공파 사당 학운재 찾아 생각에 잠겨
부친·조부가 그렇게 찾고 싶어했던 '뿌리'
"앞으로 청송심씨와 적극적 교류 할 것"
부친·조부가 그렇게 찾고 싶어했던 '뿌리'
"앞으로 청송심씨와 적극적 교류 할 것"
심수관은 심당길의 할아버지 곡산공 및 심당길의 백부들 묘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생전 자신의 부친과 조부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뿌리였다. 동석한 청송심씨 관계자는 "젊은 나이에 일본에 끌려간 사람이 누가 있을지 찾아봤더니 1598년에 끌려간 심찬 밖에 없었고, 기록을 검토해 심찬이 심당길과 동일인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참배를 마치고 학운재로 돌아온 심수관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고향에 돌아온 건 나지만, 가장 돌아오고 싶었을 당길 할아버지가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며 "아마 당길 할아버지가, 그리고 당길 할아버지의 부모(심우인)가 지금 가장 기뻐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국의 청송심씨와 적극적으로 교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참배를 마치고 학운재로 돌아온 심수관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고향에 돌아온 건 나지만, 가장 돌아오고 싶었을 당길 할아버지가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며 "아마 당길 할아버지가, 그리고 당길 할아버지의 부모(심우인)가 지금 가장 기뻐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국의 청송심씨와 적극적으로 교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당길이 남원성에서 끌려갔을 때 도공 일행은 17개 성에 80여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풍랑을 만나 가고시마에 닿았을 때는 생존자가 43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당길 등 조선 도공 일행은 오두막을 세운 뒤 황무지에 밭을 일구고 도자기를 구우며 정착을 도모했으나 원주민들의 냉대로 생활이 쉽지 않았다. 이후 남원의 산천과 흡사한 '미야마'라는 곳으로 이동해 정착한 일행은 사쓰마번을 지배하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의 지원으로 명품 도자기 '사쓰마야키'를 만들어 낸다.
많은 도공 중에 심수관 일가 주목 받은 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기록 있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기록 있어
조선 백자에 심취해 있던 시마즈는 조선의 도공들에게 백자와 똑같은 도자기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도공 일행은 하얀 도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 백자와 유사한 아이보리색 도기 '시로사쓰마'를 만들고, 일본 농가의 생활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은 큰 항아리 '구로사쓰마'도 내놓는다.
많은 도공 중에 심수관 일가가 주목을 받은 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고 한국 성씨(청송심씨)를 15대째 이어왔기 때문이다. 심수관은 흙도 유약도 구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 조선 도자기의 맥을 지켰다. 사쓰마번 도자기공장장이었던 12대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대표로 높이 180㎝의 화병 한 쌍 등 여러 작품을 출품하며 일본 최고 도예명가로 공인을 받았다.

심수관가는 몇 해 전 국내에서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14대 심수관이 2019년 6월 향년 92세로 별세하면서 한국에서도 관심이 집중됐다. 명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14대 심수관은 명가를 건사하는 와중에 한일 문화교류에 노력한 공로로 1989년 한국정부로부터 가고시마 명예총영사 직함을 얻었고, 1999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4대 심수관은 조선 도공의 망향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4년작)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와세다대와 이탈리아 국립미술관 도예학교를 졸업한 15대 심수관은 나이 서른 무렵 김칫독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주 김일만토기공장에 머문 적이 있다. 지난 2018년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기념하는 '사쓰마도기 420년·심수관 요(窯)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지인들과 함께 한국 곳곳을 둘러보는 등 고국에 대한 애착이 컸는데, 구체적인 뿌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당길의 아버지가 묻힌 대곶면 선영에 15대 심수관이 도착했을 때는 수십명의 내외신 기자와 청송심씨 관계자 등 환영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심대평 대종회장을 비롯해 김병수 김포시장, 김주영·박상혁 국회의원 등이 뙤약볕 속에 끝까지 자리하며 심수관의 귀향을 따뜻하게 맞았다. 행사장 일대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한일포럼, 한일문화교류기금, 한일문화교류회의, 주한국일본대사 등의 화환으로 둘러싸였다.
와세다대와 이탈리아 국립미술관 도예학교를 졸업한 15대 심수관은 나이 서른 무렵 김칫독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주 김일만토기공장에 머문 적이 있다. 지난 2018년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기념하는 '사쓰마도기 420년·심수관 요(窯)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지인들과 함께 한국 곳곳을 둘러보는 등 고국에 대한 애착이 컸는데, 구체적인 뿌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당길의 아버지가 묻힌 대곶면 선영에 15대 심수관이 도착했을 때는 수십명의 내외신 기자와 청송심씨 관계자 등 환영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심대평 대종회장을 비롯해 김병수 김포시장, 김주영·박상혁 국회의원 등이 뙤약볕 속에 끝까지 자리하며 심수관의 귀향을 따뜻하게 맞았다. 행사장 일대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한일포럼, 한일문화교류기금, 한일문화교류회의, 주한국일본대사 등의 화환으로 둘러싸였다.

선영 근처의 청심재에서 고유제(중요한 일을 치르고 선조들에게 내용을 알리는 제사)까지 무사히 마친 심수관은 전국의 청송심씨들이 보내온 선물을 받아들며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음을 실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지는 일만 개이지만 뿌리는 하나라는 뜻으로 400년 수령 소태나무에 새긴 서각작품 '만지일근', 이천의 도자기, 가계도를 다시 정리한 감사패 등 의미 깊은 선물이 곳곳에서 답지했다.
축사에 나선 심대평 대종회장은 "오랫동안 역경을 겪으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심수관의 은덕과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30만 청송심문이 바람막이가 되어주겠다"고 덕담했다.
이어 김병수 김포시장은 "15대 심수관의 선친께서 '금고리가 되지 말고 쇠고리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던 걸로 안다. 빛나지는 않을지언정 튼튼한 쇠고리가 되어 나보다 후대가 잘 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그 정신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말했다.

너의 뒤에는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
소감 발언에서 심수관은 "저의 증조부인 12대 심수관은 일본을 대표해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었고, 조부인 13대 심수관은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도 도자기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으며, 부친인 14대 심수관은 한일교류에 힘을 쏟는 일생을 보냈다"며 "저는 지금도 초대 심당길 할아버지의 의지를 받들어 심씨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끝으로 그는 "오늘 심당길의 후손으로서 참배를 했는데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부모님, 본인이 어릴 적 뛰놀았을 김포를 평생 잊지 못하셨을 걸로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너는 절대로 외로움을 느끼지 마라. 너의 뒤에는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심씨(심당길) 가문은 424년 동안 단 한 번도 심씨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일을 한 적이 없음을 보고드린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