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 소방관들에게도 기념일이 있다. 긴급 신고전화 '119'를 딴 11월9일이다. 9일은 '제60회 소방의날'로 국민의 안전의식과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에 더 의미가 깊다.
소방의날을 맞아 경기도소방재난본부를 대표하는 전·현직 소방관들을 경기지역의 단 하나 남은 옛 안양소방서 소방망루에서 만났다.
# 박성봉 재향소방동우회 경기남부회장
폭우로 마을 하나 통째로 파묻혔던 사건
흙더미 헤쳐가며 시신 모신 선배들 귀감
정권 편의 따라 치이며 홀대받았던 조직
'존경받는 직업' 위상 누리지 못해 아쉬워
주인공은 1977년 안양소방서 개서 당시 경기소방 1기생 초임 소방관이었던 박성봉 대한민국재향소방동우회 경기남부회장과 2003년생으로 올해 신규임용 소방관 중 최연소자인 화성소방서 남양119안전센터의 막내 화재진압대원 임성범 소방사다. 임 소방사는 경기소방 신임소방사반 74기다.
올해 만 나이로 75세인 박 회장은 1999년 12월 수원소방서에서 소방령으로 퇴직해 현장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직접 경험한 재난현장은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박 회장은 "안양소방서에 배치를 받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마을 하나가 통째로 파묻히는 일이 있었다"며 "뜨거운 여름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흙더미를 헤쳐가며 시신을 한 구 한 구 소중히 모셨다. 선배 소방관들의 숭고한 봉사 정신을 그 때 알았다"고 회상했다.
재직하는 동안 숱한 참사현장을 경험했지만, 예방에 대한 인식 부재와 안전 불감증 탓에 수십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은 안양 비산동 의류가공공장 화재도 잊지 못한다.
박 회장은 "옷 만드는 공장 1층 계단참에 쌓아둔 섬유에 불이 붙으면서 유독가스가 발생했고, 그 연기에 꽃다운 나이의 여공 23명이 미처 인생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숨졌다"며 "겨우 불을 다 끄고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박힌 숨진 여공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소방공무원이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시기는 오래지 않았다. 반세기 전 발을 들인 뒤 세기말에 퇴직한 박 회장에게서 존경받는 직업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소방공무원의 빛나는 위상을 누려보지 못한 설움이 느껴졌다.
그는 "경기소방 공채 1기로 우리 동기생들은 모두 시험을 보고 입직을 했는데, 주민들은 우리를 경찰 파출소에서 한두 명씩 근무하던 의용소방대원과 별반 다르다고 여기지 않았다"며 "예전엔 불만 끄러 다녔지 지금 소방조직처럼 화재뿐 아니라 구조, 구급, 생활안전 분야에서 널리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소방청이 신설된 뒤 2020년 국가직으로 전환되면서 각 지역 소방관들의 처우가 상향 평준화됐지만, 과거엔 정권의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치였던 홀대 받는 조직이 바로 소방이었다.
박 회장은 중앙에 민방위본부 소방국, 지방에 민방위국 소방과가 있던 시기를 거쳐 행정자치부에 소방국이 설치되고 각 시·도에 소방본부, 시군에 소방서를 설치한 지방자치시대 출범까지 경험한 세대였다.
박 회장은 "공기호흡기는커녕 마스크 하나도 사비로 구해다 써야 했고 장갑, 장화, 헬멧 등 개인장구도 다 공용이었다. 지금은 안전하게 펌프차 안에 올라타 화재현장에 나가지만, 우리 땐 미군이 쓰던 트럭 뒤에 단 평행봉에 매달려 현장으로 내달렸었다"며 "그래도 큰불이 난 현장에서 수관을 들고 열심히 진화작업을 하고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입에 막걸리 한 사발 부어주는 정이 있었다"고 소싯적을 기억했다.
# 임성범 남양119안전센터 막내 소방사
사람들 구하는 영웅 만화·영화 좋아하다
직접 그렇게 되기 위해 공부와 운동 시작
지역민들의 생명·재산 지키는 임무 뿌듯
80·100회 소방의날에도 경기소방 지킬것
박 회장의 손녀와 동년배인 임 소방사는 대선배의 '옛날 이야기'에 연신 놀라며 앞서 간 소방관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고교 졸업장을 채 받기도 전인 올해 1월7일 임용된 임 소방사는 "자기를 희생하고 불살라서 사람들을 구하는 히어로(hero) 장르의 만화나 영화를 좋아하다 현실 세계에서 영웅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소방관이 되려고 공부하고 운동했다"고 소방조직에 몸담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배 소방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후배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지만, 함께 지내는 센터의 선배들과 정을 나누면서 지역민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지키는 소방관 본연의 임무를 기쁘게 수행하겠다"고 다짐했다.
두 전·현직 소방관이 만난 소방망루는 설치 당시 안양에서 가장 높이 솟은 건축물이었다. 서울종로경찰서 보안과장 출신으로 초대 안양소방서장으로 부임한 고인환 서장이 당시 안양시장을 설득해 화재 감시탑 목적으로 세운 시설물로 현재 견학·교육 목적으로 사용 중이다.
박 회장이 힘겹게 소방망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이 야속했다. 현역시절 다쳤던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오르막 계단을 몇 걸음을 오르다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내뱉었다. 임 소방사는 이미 저만치 앞서 올라가 망루 밖으로 펼쳐진 안양 시내를 훑어봤다.
박 회장은 "현역 땐 85㎏의 근육질 몸매로 힘깨나 썼는데, 나이를 먹으니 1988년 서울올림픽 끝나고 호계파출소(과거엔 경찰·소방 모두 파출소 체제) 소장 보직을 받아 불을 끄다 떨어져 다친 다리에 말썽이 생겼다"며 "그 당시엔 공상 개념도 없어서 6개월 동안 사비 들여 병원엘 다녔다. 나는 어렵더라도 일하다 다친 전직 소방관에 대한 예우와 복지 제도를 정치권에서 손질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나이 차가 50년을 훌쩍 넘는 두 소방관에게 소방관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노년의 박 회장은 '희생 봉사자'라고 소방관을 정의했다. 박 회장의 말처럼 경기소방에서만 1977년부터 현재까지 집계된 순직 소방관만 30명이다. 순직 소방관 중에선 이름 자체가 소방 혁신 계획으로 세워져 경기도정 역사에 남은 '이병곤 플랜'의 서해대교 화재 순직자 고 이병곤 소방령도 있었다.
박 회장은 "봉사와 희생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은 소방관은 없다"며 "내 몸을 던져 생명을 구하고 그러다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은 가족들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이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했다. 후배들도 똘똘 뭉쳐 서로 의지하며 조직의 발전에 끊임없이 매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새내기인 임 소방사는 소방관을 '우산'이라고 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처럼 지역민들을 재난재해로부터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단어였다.
임 소방사는 "현재 기준으로도 정년까지 40년 이상 남았다"며 "현 임지에서 잘 적응하고 병역 의무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소방학교에서 하는 심화교육을 받아 지역민을 더욱 잘 지키는 우산과 같은 소방관이 되는 게 꿈"이라며 "80회, 100회 소방의날에도 경기소방을 지키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