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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인천 동구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이후 중구와 함께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바닷가를 둘러싼 거대한 산업단지가 형성됐고, 6·25전쟁 당시엔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크게 늘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는 산업화 물결에 따라 공장 노동자들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조업 쇠퇴 등으로 번성했던 동구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동구의 역사와 문화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탐방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화도진문화원이 진행하고 있는 '물길따라 동구길'이다. → 위치도 참조

해안선 따라 동구길
인천은 수많은 해안과 갯벌이 하나씩 매립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매립이 이뤄지기 시작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동구다. 지금은 매립으로 사라진 과거 동구의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화촌포 갯골은 지금의 화평동 냉면 골목 일대에 있는 화촌(花村) 앞으로 흘렀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화촌포 갯골은 지금의 중구보건소 위치까지 물이 흘렀고, 과거 화평파출소 앞에서 갈라진 물길은 중앙시장을 따라 배다리까지 이어졌다.

수문통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수로로 배다리 철교까지 이어져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해산물 등을 실은 배들이 오갔다고 한다.

화촌포 갯골, 과거엔 물길 배다리까지 이어져
만석동 행정복지센터 예전 '아리마 정미소' 터
 


현재 만석교회 일원에는 해수탕과 고급 음식점을 갖춘 위락시설인 팔경원(八景園)이 있었다. 물치도와 같은 연안의 섬뿐 아니라 멀리 강화도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석부두 입구 쪽에는 묘도(猫島)라는 작은 섬도 있었다. 묘도의 풍경이 워낙 아름다워 1923년 동아일보에 인천팔경 중 하나로 묘도석조(描島夕照·괭이부리에 지는 저녁 햇빛)가 소개되기도 했다.

만석동 행정복지센터가 자리 잡은 곳엔 아리마 정미소가 있었다. 이 정미소는 1932년 하루에 현미 720섬, 백미 500섬을 생산했다고 한다. 당시 인천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정미소였다.

북성곶은 조선시대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성창(城倉)의 북쪽에 위치한 곶(串)이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1879년 외세를 막기 위해 화도진 관할 포대를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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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시장인 송현자유시장은 해방 후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미군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양키시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화도진문화원 제공

노동자의 길 문학 이야기
동구는 일제강점기 시절 볏섬을 실어나르던 부두 노동자, 제조업 공장 노동자 등이 모여 살았다. 주거지를 중심으로 시장, 극장과 같은 시설이 들어서면서 도시가 점점 번화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려운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37년 인천 동구에 만들어진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은 광산용 기계와 선박 기계를 주력으로 생산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43년 일본 육군의 잠수함 건조 명령에 따라 조선소로 전환됐다.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엔 일제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직한 '근로보국대'의 합숙소도 있었다.

강경애 소설가의 장편소설인 '인간문제'에선 일제강점기 중 인천 도시 노동자들의 쟁의 등을 다뤘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의 모델이 바로 동일방직 인천공장이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전신은 1934년 일제가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방적 인천공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조 여성지부장을 탄생시킨 여성 노동운동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동일방직 등 인천 노동자들을 지원했던 곳이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도시 빈민의 열악한 생활상과 노동환경 등을 다뤘다. 소설 속 주요 배경인 '은강'은 인천이고, '기계도시'로 설명하는 공장지대는 동구 만석동이다.

부두 노동자들이 일하던 만석부두는 1930년대 말 인천부가 묘도 자리에 조성한 '북인천항'의 끝자락에 있었다. 1950~70년대 인천의 대표 어항으로 꼽히는 곳이었고, 어선뿐 아니라 영종도와 물치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출발하는 선착장이기도 했다.

조선기계제작소 사택 내 '근로보국대' 합숙소
1957년 시작 인천 대표 영화관 미림극장 건재
 


동인천역에 있는 송현자유시장은 '양키시장'이라는 명칭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다.

1930년대 생겨난 인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합시장으로 해방 후 인천의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미군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양키시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제'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항상 골목이 북적였다. 맨몸으로 피란 온 실향민들이 양키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도 했다.

1957년 천막극장으로 시작한 미림극장은 당시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오랫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문화공간이다. 현재는 '인천미림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독립영화, 예술영화 상영 등 영상 문화예술 공간으로 우리 곁에 있다.

만석-화수동 해안산책로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경인일보 DB

노을따라 해안산책로길
인천 동구에서는 개항 이후부터 이어진 갯벌 매립으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바다를 산책하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동구는 주민들이 만석동, 화수동 해안을 따라 산책하면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만석·화수 해안산책로를 조성하고 있다. 총 길이 4.72㎞ 구간을 대상으로 총 3단계로 나눠 해안산책로를 만들고 있는데, 현재까지 2.42㎞ 구간의 1·2단계 사업이 마무리됐다.

4.72㎞ 구간 해안산책로 현재 2.42㎞까지 완성
작약도서 이름 바꾼 지역 유일 섬 '물치도' 조망
 


만석·화수 해안산책로에선 동구의 유일한 섬인 물치도를 바라볼 수 있다. 물치도는 2020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작약도라고 불렸다. 작약도라는 이름은 1883년 개항 이후 이 섬을 매입한 일본인 화가가 섬의 형태가 작약꽃 봉오리를 닮았다고 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작약도가 물치도로 불렸다는 지역 역사학계 의견 등에 따라 본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영종도와 월미도 사이에 있는 물치도는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이라고 해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만석·화수 해안산책로를 거닐며 물치도와 동구 앞바다의 풍경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노을과 어우러진 해안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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