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미술은 생활하는 미술이요. 산업하는 미술이며, 나아가서는 외교하는 미술이기도 하다." ('한홍택 작품전' 브로슈어 중)
해방 이후인 그때 그 시대에도 디자인은 존재했다. 지금처럼 미술과 디자인이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되기 전이지만, 분야를 넘나들며 '산업미술'을 새롭게 정의하고 한국 디자인계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작가들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는 그러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근대화·산업화로 국가를 재건하던 시기의 미술과 디자인, 산업과의 관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에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수집된 한홍택의 작품과 아카이브, 2022년 기증된 이완석의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동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다양한 자료들이 있어 한국 근현대디자인의 태동과 전개를 다양하게 조망한다.
한국 디자인 발전 초석 마련한 작가들
미술과 디자인·산업 관계 엿볼수 있어
'한홍택·이완석' 아카이브 사회상 담아
일상표현 레터링… 내년 3월 26일까지

전시장 입구에서 조능식, 이완석, 한홍택, 권영휴의 사진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주제를 하나로 꿰는 이들은 조선산업미술가협회의 창립회원으로 정기적인 회원전을 통해 '올림픽', '관광' 등 시의성 있는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며 산업 미술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전시는 모두 4부로 나눠져 있으며, 1부인 '미술과 산업: 산업미술가의 탄생'에서는 한홍택의 초기 작업과 아카이브, 이완석이 천일제약에서 도안 담당으로 근무하던 시기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 민족말살정책으로 대부분 아이들이 한글을 읽을 수 없게 되자 해방 이후 아동문학 서적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한홍택이 재치있게 그려낸 '어린이구락부'와 '동물만화'의 삽화 원본이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2부 '모던 데자인: 감각하는 일상'에서는 사회를 복구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원조물자를 접하며 이뤄진 사회의 풍경을 다룬다. 한홍택의 작품에는 서구적 미모의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가정생활', '여원', '주부생활' 등 잡지 표지에는 세련된 복장과 짧은 머리, 하얀 피부에 메이크업으로 단장하고 당당한 시선을 보내는 현대적 여성들이 그려져 있다.
당시 '현대적인 것'은 '서구적이고 미국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이를 욕망하고 모방하며 주체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새로운 여성이 탄생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부 '정체성과 주체성: 미술가와 디자이너'에서는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지닌 한홍택의 작업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지속해서 개인전을 열며 '디자인', '그래픽아트'와 같은 용어를 도입했고 이 분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곳에서는 화가로 주목받았지만 산업미술가로 입지를 확장한 문우식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4부 '관광과 여가: 비일상의 공간으로'는 당시 산업미술가들이 그려낸 관광포스터 원화들이 있다. 경주와 제주, 강원도 등 지역의 특징과 함께 작가들의 개성이 담긴 여러 포스터들은 지금 봐도 세련된 느낌을 주며 흥미를 자아낸다.
전시에는 작가들이 전시회를 위해 원화로 그린 작품들이 많다. 인쇄된 작품과 원화로 그려진 작품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며, 1950~1960년대 일상과 인물 등을 담은 영상작품, 동시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재탄생 시킨 기업의 로고와 다양한 레터링 작품들도 당시의 감성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전시는 내년 3월 26일까지.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