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자 마주한 건 '고집'스럽게 즐비한 3천여 권의 책들이었다. 70여 평 규모에 책장, 책상, 바닥엔 온통 책뿐이었다. 정말이지 '책고집'이란 이름에 충실한 장소였다.
요즘 행궁동이 20~30대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부상한 터라 그럴듯한 디저트 메뉴 한두 개만 추가하면 충분히 SNS 카페 명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의 별명인 '최고집'을 쏙 빼닮은 탓인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책고집은 2014년 온라인 독서 동아리로 출범한 인문독서공동체다. 현재 전국 회원 수는 무려 3천여 명이 넘는다. 2018년 12월엔 수원화성 장안문 성곽 안쪽 골목에 위치한 옛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경기지부 사무실 자리에 '작은 도서관 책고집'을 열었다.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57) 책고집 대표가 직접 사비를 털어 마련해 운영한다.
최 대표는 인문학을 '사람에게 온기를 전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그의 지론이 책고집 프로그램에 투영돼 있다. 이곳에선 회원들이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서로 소통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등 내로라하는 각계 전문가들이 수준 높은 강연을 하기도 한다.
"남들은 이 좋은 공간을 놀리고 있다고 한다. 단가 높고 맛있는 음식 몇 개를 추가하면 돈벌이도 될 텐데 뭐하고 있냐 묻기도 한다. 하지만 책고집은 소득, 성별, 계층 상관없이 책을 보고 인문학 강연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다 사라지는 추세에 이런 공간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 찾아' 강연
"사회복지사가 되겠다"… 30대 노숙인에 희망 주는 결실 맺기도
최 대표는 2005년부터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인문학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 장소는 노숙인센터,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교도소 등이다. 따라서 강연 대상도 노숙인, 어르신, 장애인, 교도소 재소자, 한부모 가장 등 소위 말해 우리 사회 소외계층이다.
강연만 하고 돌아선 건 아니었다. 끝난 후엔 수강생들과 밥도 먹고 술잔도 기울였다.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위로하고자 했다. 돈이 될 리는 없었고 처음 함께했던 동료 대다수가 떠나기도 했다. 그들에게 인문학 강연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곳에서 강연하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최 대표는 신념을 되새겼다. 그는 "인문학 강연을 처음 할 때부터 결핍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희망을 찾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야학을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때 야학 교사를 했던 내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신념을 밀고 나가자 좋은 결실을 보기도 했다. 강연을 들은 노숙인이 목표가 생기고 꿈을 찾은 것이다.
최 대표는 "강연이 끝난 뒤 한 30대 노숙인 친구가 따라 나왔다. 사회복지사분들이 고맙긴 한데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본인이 직접 해보겠다고 말하더라. 내 소신이 틀리지 않았구나 느꼈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런 최 대표도 코로나19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대면으로 강연과 모임을 하던 책고집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자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19 발발 첫해인 2020년은 전년도에 비해 강연 수가 절반으로 줄고, 회원들의 발길도 그만큼 끊겼다.
최 대표는 "임대료와 직원 월급 등 책고집을 운영하는 데 드는 고정비가 1년에 4천만원에서 5천만원 정도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 2년 동안 진 빚이 꽤 된다. 어렵지만 이제야 희망이 좀 보인다. 다시 열심히 뛰어야 한다"며 웃어 보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최 대표는 직접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8월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어르신 인문학 강연을 시작했다. 수원시 우만종합사회복지관에서 평균연령 70대 중반의 어르신 20여 명을 대상으로 처음 진행했다. 반응이 좋아 지난 10월 복지관 두 곳에서 추가로 강연했다.
어르신들의 호응은 좋았다. 전문적인 물리학과 도시재생학 강연부터 판소리, 글쓰기, 그림 그리기까지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강연도 있었다.
최 대표는 "강연이 끝나자 어르신들께서 '왜 이제 왔냐'고 물으셨다. '왜 이렇게 일찍 끝나느냐'면서 우는 분도 계셨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낯선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실까 생각이 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왜 이제 온거야"… 판소리·글쓰기 체험한 어르신들 뜨거운 반응
'정조의 도시' 이름에 걸맞게 수원 정체성 알리는 프로그램 구상
하지만 좋은 반응과 달리 어르신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을 진행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선뜻 후원하려는 지자체나 후원회가 없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어르신 인문학 강연을 열려고 한 지자체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어르신은 표가 안 된다. 청년이나 주부를 위한 강연을 기획해 오면 후원하겠다'고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예산을 표로만 생각하다니 정말 충격적인 발상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최 대표는 앞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을 늘릴 예정이다. 동네 식당 같은 동네 인문학의 중요성을 명심하기 때문이다.
"동네 식당은 음식뿐 아니라 정을 나누는 공간이다. 어르신을 비롯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찾는 식당은 동네 식당이다. 이곳에선 허기뿐만 아니라 텅 빈 마음도 달랜다. 그런 동네 식당 같은 동네 인문학을 하고 싶다. 어르신들에게 거창한 인문학이나 철학 강연을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 신호 지키는 게 민주주의예요'라고 얘기할 수 있는 인문학 말이다. 책고집의 꿈은 동네 식당 같은 동네 인문학을 하는 것이다."
17년째 '거리의 인문학', '동네 인문학' 외길 인생을 걸어온 최 대표는 책고집에서 '정조의 도시'인 수원의 정체성을 알리는 강연을 구상하고 있다.
최 대표는 "영국에 갔더니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참 자랑스러워하더라. 그래서 영국에선 1년 365일 셰익스피어의 문학 연극이나 강연들이 매일 열린다"면서 "하지만 수원은 정조의 도시라고 하지만 그에 걸맞은 이름값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자랑스러운 정조의 도시인 만큼 책고집에 가면 늘 정조 강연을 볼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사진/김명년기자 kmn@kyeongin.com
■최준영 대표는?
▲1966년생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등단
▲성프란시스대학교(노숙인 인문학 강좌) 교수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교수
▲경기문화재단 편집주간 및 출판팀장
▲군포시청 홍보기획팀장
▲저서 9권 출간 : '결핍의 힘', '동사의 삶', '동사의 길', '최준영의 책고집', '결핍을 즐겨라',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행복한 인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