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인생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때때로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연극 '오펀스'와 '올드 위키드 송'은 모두 관록을 갖춘 베테랑 배우들이 하나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처럼 등장한다. 극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이들과 연기력을 갖춘 젊은 배우들의 조화는 극의 균형과 완성도에서도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들이 함께 나누는 대사와 눈빛, 행동들을 곱씹으며 마음 깊숙한 곳의 따뜻함을 느껴볼 수 있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감동과 성장의 '오펀스'

22-오펀스_공연사진_02-박지일-신주협
'오펀스' 공연 장면. /레드앤블루 제공


낡은 커튼, 헤진 소파, 계단에 쳐진 거미줄, 쌓여있는 마요네즈 통…. 온기는 찾아보기 어려운 집에 살고 있는 트릿과 필립 형제는 세상에 남겨진 고아이다. 폭력적이지만 누구보다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살아온 트릿은 어린 시절 동생이 죽을뻔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필립이 집 안에서 색이 칠해진 칸으로만 건너다니고, 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틀 안에 갇힌 삶을 사는 이유이다.


좀도둑 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트릿은 어느 날 큰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술에 취한 중년의 갱스터 해롤드를 집으로 데려온다. 자신이 고아원에서 자랐음을 털어놓은 해롤드는 트릿을 '앵벌이 키즈'라고 부르며 그 집의 자발적(?) 인질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높은 급여가 포함된 일자리를 제안한다. 

좀도둑 생활로 생계 잇는 두 형제
중년 갱스터와 함께 지내며 삶의 변화
숨겨둔 고독 괜찮다며 토닥이는 듯
그와의 희한한 동거는 형제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좋은 가구와 고급스러운 오브제, 깨끗해진 집, 명품 옷을 걸친 형제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사라졌다. 필립은 형이 사다 주던 마요네즈가 더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게 됐다고 얘기하고, 해롤드의 격려와 함께 조금씩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트릿 역시 해롤드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22-오펀스_공연사진_02-박지일-신주협
'오펀스' 공연 장면. /레드앤블루 제공

이 과정에서 해롤드가 형제를 바꿔나가는 대화의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다. 신발끈을 묶지 못하는 필립에게 로퍼를 선물하거나, 요리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외국어를 할 줄 알게 됐다며 치켜세우는 등 부정이 아닌 긍정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나아가게 토닥인다.

하지만 갈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은 찾아온다. 형제들에게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뛰어넘어야 하는 하나의 장애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격하게 토해내는 시간에 맞닥뜨린 그들, 그 안에서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트릿이 가지고 있던 연약함과 내밀한 감정, 결국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필립이 터트려낸 외침들이 드러난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서사에서 두 형제를 진심을 다해 토닥이는 해롤드의 마지막 장면은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어쩐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꿋꿋하게 살아왔지만 그 안에 숨겨둔 힘겨움과 고독함, 또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마음의 한구석을 들키는 듯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며,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발 더 내디딘 두 형제를 마치 내 모습처럼 응원하게 한다. 비록 결핍으로 가득했던 세 사람의 삶에도 가족처럼 따뜻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음을, 그래서 이들이 맺은 특별한 관계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슬픔과 환희의 '올드 위키드 송'
ki.jpg
'올드 위키드 송' 공연 장면. /나인스토리 제공

잔뜩 날이 서 있는 한 남자가 괴짜 교수 '요세프 마슈칸'의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는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 '스티븐 호프만'. 스티븐은 원래 쉴러 교수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왔으나, 그를 맞이한 마슈칸은 자신에게 먼저 3개월간 노래를 배우라고 한다. 그렇게 스티븐이 마슈칸에게 배우게 된 곡이 바로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이다.

살아온 배경도, 예술적 성향도 무척이나 다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한 곡씩 배워나갈 때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괴짜 교수와 만난 천재 피아니스트
청춘의 허무·사랑의 고통 배우며 성숙
베토벤·바흐 등 명곡 듣는 즐거움도

'올드 위키드 송'이라는 작품의 서사는 시인의 사랑과 함께 흘러간다. 이 곡은 슈만의 가곡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다. 삶이 사랑으로 가득했던 슈만의 작품인 만큼 사랑의 시작과 실연의 아픔, 지나간 청춘에 대한 허망함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고통이 담겨있다.

반주부와 가사, 그리고 극에서 이어지는 대사들이 촘촘하게 엮여 있는 이 작품은 시에 곡이 붙여져 완성된 연가곡의 특징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져 진정한 동료이자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22 올드 위키드 송_공연사진_안석환 홍승안 2
'올드 위키드 송' 공연 장면. /나인스토리 제공

작품의 배경은 나라와 민족, 또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상흔인 홀로코스트가 줄기이다.

유대계 미국인 피아니스트였던 스티븐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가며 겪는 내적 고통,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혼란은 같은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마슈칸과 함께 노래하며 정리해 나가고, 동시에 자신 안의 열정도 발견하게 된다.

 

슬픔과 환희라는 두 단어는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이 감정의 아이러니가 '올드 위키드 송'을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마치 남을 따라 하는 모조품 같아 피아노 치기를 그만둔 스티븐에게 시인의 사랑이라는 곡이 주는 다양한 감정과 가사가 주는 의미는 더욱 특별했는지도 모른다.

마슈칸의 낡은 스튜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의 선율과 노래는 요동치는 감정들 속에서 그들이 단단하게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오롯이 표현한다. 스티븐이 피아노로 감정을 표현할 때 흘러나오는 차이콥스키, 리스트, 베토벤, 바흐 등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도 이 극을 즐길 수 있는 포인트이다.

인생은 늘 명확하진 않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진정한 동료가 된 그들처럼 서로에게 치유받고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 한 편에서 마치 축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5시 35분을 가리키던 고장 난 시계가 다시금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