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부랑아를 선도하겠다'는 명목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을 잡아와 인권침해를 자행했던 선감학원. 폐원한 지 40년만인 지난해 12월 선감학원 피해자 166명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국가와 경기도에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의 인정을 요구하는 국가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첫 소송'이지만 피해자들은 '마지막 선택지'라고 절규했다.
역사적 소송의 한가운데, 김영배(68)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이 있다.
10년 전만 해도 수면 아래에 묻혀 있던 선감학원 문제가 세상에 밝혀지고, 진실 규명을 넘어 국가 상대 소송까지 올 수 있었던 중심에는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역할이 컸다. 협의회는 흩어진 100여명의 피해자들을 모으고, 그들의 애환을 대변해 진실규명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해 왔다.
김 회장은 이번 국가 소송을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2012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진상 파악을 요구하는 첫 탄원서를 보낸 후 경기도와 경기도의회, 국회, 정부 부처 등 관계기관을 오가며 '진실'을 위한 싸움을 이어왔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이제 '법'에 호소하는 일 외엔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을 모았다.
그는 "정부가 피해자들을 인정하고, 대책을 세우거나 면담 요청 등 접촉하는 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인데, 그런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아 법에 호소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피해자들에게 이번 소송은 마지막 선택지다. 선감학원에서 아동기에 겪은 고통으로 정상 생활을 못 하는 사람들이 166명 중 대부분이고, 노년기에 접어들며 이들의 생활고와 트라우마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결정하고 행정안전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와 경기도에 공식 사과, 피해 대책 마련 등을 담은 권고사항을 보냈지만, 관련 정부부처는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김 회장은 "해결의 시작은 전국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대통령, 중앙정부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와 지시가 있어야 부처들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과거 국가가 선감학원 인권유린을 자행했다는 증거가 명백히 있다. 이제는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관련 법률이나 특별법이 없어 국가의 피해 보상을 지원받을 수 없다. 그나마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공식사과를 한 경기도가 올해부터 500만원의 위로금과 월 20만원의 지원금을 도내 거주 피해자에게 지급하겠다 약속했지만, 피해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아니다. 60% 이상의 피해자는 경기도가 아닌 타 지역에서 살고 있어 한계가 여전하다.
제한된 지원에 대해 문제 제기했던 김 회장은 "협의회에선 전국 피해 보상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전달했지만, 경기도에서는 각종 법적 문제가 막혀 있어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경기도에서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며 "국가 소송으로 나선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커지고, 점점 버틸 힘이 없어지다 보니 정부의 조처만 기다리기엔 힘들다 판단해 법적 판단을 받기 위해 나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라우마 치료 절실한데… 비용 많이 들고 지원 기관도 부족
김 회장은 "트라우마 치료가 절실하지만, 지속적인 치료에는 금전적 비용이 많이 들고 관련 단체나 기관도 적은 상태다. 소송을 함께 진행한 피해자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실질적으로 생활고보다 정신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훨씬 많다"며 "이번 소송을 나설 때도 망설인 피해자가 많다. 소송에 필요한 소장 제출, 피해자 진술하려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다시 한 번 큰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와 어려움을 겪은 피해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선감학원 사건 해결에 앞장서온 김 회장의 삶은 온통 선감학원으로 점철됐다. 어린시절 선감학원에서 고통을 받았고 선감학원을 나와서도 그 피해를 알리고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업까지 포기하며 협의회를 이끌었고 어린시절 고통을 감내하면서 수많은 언론 앞에 피해자를 대표해 서야 했다.
그는 "2018년부터 사업도 접고, 수익도 없이 선감학원 해결에만 전념하다 보니 스트레스는 늘었다"며 "회장직을 맡은 초기에는 선감학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적어 단체 운영과 관련된 후원이나 지원도 없었다. 사비까지 털어 운영하다 보니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했다.
트라우마도 커졌다. 그는 "수많은 인터뷰 요청에 (대표로) 응하다보니 트라우마도 심해졌다.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나 또한 피해자다. 수십 년 전 일이라 이제는 조금씩 옅어졌다지만,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그 고통을 매번 전달하다 보니, 자다가 비명을 지르거나 발작을 일으켜 가족들도 건강을 심각히 걱정할 정도로 생활이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협의회 활동을 멈출 수 없었다. 피해 신고를 접수한 235명, 국가 소송에 함께 뜻을 모은 166명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공식적으로 사과받기 위해 그는 맡은 책임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게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김 회장은 "솔직히 괴롭고, 힘들다. 회장을 시작할 때 진화위로부터 피해자 인정을 받는 것을 1차 목표로 세웠다. 어떻게 보면 이제 내가 할 만큼 하지 않았나 싶지만, 나와 함께 해온 100여명의 피해자를 생각하면 이 일을 내려놓을 수 없다"며 "특히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내려놓기 힘들었다. 내가 아닌 누가 와도 선감학원 문제는 해결해 나아가겠지만, 내가 조금 더 희망을 품고 문제 해결에 나서려 한다"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진심 어린 사과받고 더는 '부랑아' 낙인되지 않는 세상 오길
그래도 그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5년 전만 해도 혼자 선감학원 문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진화위가 피해사실을 인정했고 경기도가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며 수많은 시민단체와 지역사회가 선감학원 문제 해결에 함께 나서주고 있어 원동력을 얻고 있다.
김 회장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문제지만, 이제는 선감학원 문제해결에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 있다. 얼마 전 안산의 시민단체 43개가 마중물이 되겠다는 연락을 줬고, 지역사회에서도 도움을 주겠다는 요청이 지속되고 있다. 피해자들 홀로 시작한 이 싸움에 연대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날수록 정말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국가 소송이지만, 김 회장은 그동안 외쳐온 목소리가 변화와 지역사회의 연대로 나타났듯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선감학원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피해자지원센터도 생기고 2019년부터 협의회가 비영리 단체로 등록됐다. 이렇게 변화한 것처럼 이번 소송으로 국가로부터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고, 선감학원 진실 규명에 뜻을 모으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힘줘 말했다.
김 회장은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이제 그만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국가폭력의 당사자인 '국가'가 제대로 사과한다면 더 이상 자신들이 '부랑아'로 낙인되지 않는 사회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살고, 경제적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변화돼야 회장으로서 마음이 풀릴 것 같다. 우리의 피해를 인정받고, 어린 시절 우리의 고통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그것 하나만 바라보고 지금껏 달려왔다. 200명이 넘는 피해자들과 함께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선감학원의 문제를 더 알리고, 사과받을 것이다"고 호소했다.
글/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사진/이지훈·김동한기자 jh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