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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 집은 안전할까?"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120억원대 전세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된 속칭 '건축왕'이 재판에 넘겨졌다. 수도권을 비롯해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전세사기 사건이 잇따르면서 전·월세 임차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평생 모은 돈과 대출을 끌어모아 마련한 전세보증금을 모두 잃을 처지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추산한 피해 가구는 지난 6일 기준 3천131가구에 달한다.

지난달 28일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졌다. 전례 없는 규모의 전세사기 피해로 서민들이 주거 불안에 처한 이 상황을 안상미 대책위원장은 '사회적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건축업자, 인천·경기에 2700여채 보유
고용 중개사들 실제 주인 숨기고 소개
전세금 못돌려 받은 세입자 극단 선택

정부·인천시 피해지원센터 운영 등 지원
만기 대출·당장 살 곳 마련부터 '문제'
기재부·법무부 등 범정부적 대책 필요


■ 건축업자, 공인중개사 등이 공모한 조직적인 전세사기

사건의 중심엔 건축업자 A(61)씨가 있다. A씨는 2009년부터 공인중개사, 보조원의 명의를 빌려 소규모 아파트나 빌라 건물 등을 지은 뒤,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과 주택 담보 대출금을 모아 새 공동주택을 신축하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늘려갔다. 그렇게 A씨가 인천과 경기도 일대에 보유한 주택은 2천700여 채에 달한다.

A씨는 고용한 공인중개사에게 자신이 소유한 주택의 중개를 전담하도록 했고, 급여와 계약 체결에 따른 성과급도 지급했다. 공인중개사들은 A씨가 실제 집주인인 사실을 숨기고 전세계약을 맺도록 했고, 경매가 개시되고 있는 상황에도 계속해서 사기 행각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A씨와 관련된 이들이 50여 명이나 된다. 계약 당시 근저당(주택담보대출)이 있어 불안해하는 피해자들에게 공인중개사가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보증금을 대신 갚겠다는 '이행각서'까지 써주며 피해자들을 안심시켰다. 물론 이 '이행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었다.

지난 15일 161명의 전세보증금 125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A씨는 범행에 가담한 공인중개사 등 공범 6명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7월 미추홀구 일대에서 세입자들의 고소가 집중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나선 지 8개월여 만이다.

전세사기 피해사망자 추모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사망자 추모제가 열린 지난 6일 오후 인천 주안역 남광장에서 피해자모임 회원과 시민들이 촛불을 나누고 있다. 2023.3.6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정보 불균형이 피해를 키웠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계약할 때 건축주와 공모한 악성 공인중개사를 거를 방법이 없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피해자 중 다수가 신혼부부, 청년층으로 '이행각서'까지 써주는 공인중개사를 의심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전세 계약을 맺기 전부터 집주인의 밀린 세금과 은행 이자를 집주인의 동의 없이 세입자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등기부등본에 나오지 않는 미납된 세금을 확인하기 위해선 집주인의 동의를 받아 세무서에서 열람하거나, 집주인에게 납세 증명서를 요구하는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미납된 세금(국세, 지방세)이 있으면 주택이 경매나 공매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2021년 4월 공인중개사를 통해 건축업자 A씨가 소유한 미추홀구 도화동의 한 오피스텔을 전세 계약한 피해자 성모(49)씨는 이듬해 이웃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나서야 계약 당시에 A씨가 연체한 세금이 10억여원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씨는 계약 전 근저당은 확인했지만,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미납 세금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전세사기 피해가 전국적으로 번지자 뒤늦게 정부는 4월 1일부터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미납 세금을 집주인 동의 없이도 세무서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중개인이 계약 전 임대인의 세금과 이자체납 등 신용정보와 선순위 권리관계 등을 확인하는 법안, 임대인의 국세·지방세 연체 내역을 등기부등본에 기재하는 법안도 지난해 12월 발의됐다.

피해가 발생한 미추홀구 빌라 등은 신축으로 거래가 없어 계약 당시 시세를 알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 전세보증금과 근저당을 합한 금액이 주택 가격보다 높은 이른바 '깡통전세'였다.

또 다른 피해자 김모(43)씨가 2021년도 10월 전세보증금 9천만원으로 계약할 당시 공인중개사는 시세 2억5천만원이라며, 근저당 1억3천만원과 보증금 9천만원을 합쳐도 주택 가격을 넘지 않아 절대 경매로 넘어갈 일이 없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경매로 넘어간 김씨의 전셋집 감정평가액은 1억7천만원이었다.

지난달 2일 정부는 시세 부풀리기를 막고자 실거래 가격을 알 수 없는 주택의 경우 한국감정평가사협회가 추천한 법인의 감정가만 보증보험에서 인정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임대사업자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보험 가입은 유예 기간을 거쳐 2021년 8월 이후 의무화됐지만, 지자체의 단속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수도권에서 임대사업자가 보증보험을 가입하지 않아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는 28건, 인천 지역에선 단 4건뿐이다.

전세보증금 규모가 작은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최우선 변제금'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도 많다. 건축업자 A씨가 소유한 미추홀구 숭의동의 한 아파트 임차인 정모(28)씨는 전세 계약을 한차례 연장하며 8천만원에서 9천500만원으로 증액한 전세보증금이 소액임차인 기준에서 벗어나 최우선변제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정씨는 보증금을 증액하면 최우선변제금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계약 연장 당시 알지 못했다. 정씨처럼 최우선변제를 받지 못하는 세대는 대책위 가입 세대 431세대 중 132세대(27.5%)에 달한다.

인천지검 미추홀구 전세사기 수사 중간브리핑
지난 15일 인천시 미추홀구 전세사기사건 중간수사결과 브리핑이 열린 인천지검 대회의실에서 박영빈 제1차장검사가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23.3.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경매를 앞둔 피해자들에겐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간 피해자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만기가 다가오는 전세대출을 해결하고, 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전세대출금 상환을 위해 신용대출을 무리해서 받거나,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고 대책위 관계자는 말했다.

이런 피해자들의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국토부와 인천시는 지난 1월 31일 인천 부평구에 전세사기 피해지원센터를 열었다. 이곳에선 피해자 법률 지원, 긴급 주거지원, 저금리 대출 등 전세사기 피해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오는 5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대환대출 상품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지난 10일엔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경매 낙찰 전에도 긴급 주거지원,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전세피해 확인서를 발급하는 방안 등을 추가로 발표했다.

대책위 안상미 위원장은 "추가 대출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피해자들에게는 신속한 대환대출이 필요한데, 5월 전 경매가 끝나거나 이미 낙찰된 세대들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며 "새로 살 집을 구할 목돈을 마련하기까지 피해 회복에 걸리는 시간이 필요한데 긴급 거처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피해자들의 주거 불안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경매 낙찰 전까지 피해자들은 당장 이사할 곳을 마련하고, 대출 상환을 위해 돈을 마련하는 등 시간에 쫓기고 있다. 기획재정부, 법무부 등 경매 중지 대책을 논의할 수 있는 기관들이 모인 범정부 TF를 구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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