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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북한군, 대구 점령 '총공세'… 미군 하루 새 1245명 손실
최악의 상황 속 유엔군 반격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사수
영천 돌파한 인민군, 후방 깊숙이 침투하다 오히려 포위
집요한 공격 막고 마침내 인천상륙작전·반격 발판 마련


■ 하루 동안 미군 1천245명 손실 악몽의 날


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

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천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제8군사령부는 어떠한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야만 했다. 주 지휘소와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구에는 전방지휘소만 운용했다.

북한군 공격도 그때쯤 한계에 다다랐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 및 병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북한군 공격이 12일 무렵 시들해지면서 대구는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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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사한 모습 그대로 호국영령이 됐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 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 전체 위기 봉착

9월 들면서 북한군은 다부동을 통한 대구정면보다는 오히려 영천 돌파에 더 치중했다. 당시 영천에는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과 제1군단의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2개 사단(제8·15사단)과 대치했다.

2일 밤 북한군 제8사단이 영천 서북쪽의 신령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은 보현산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 제8사단은 다음날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때 북한군 김무정 제2군단장은 "제12사단은 안강을 돌파했는데 제15사단은 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박성철 제15사단장을 해임하고 조광렬 소장으로 교체했다. 박성철 소장이 지휘한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이래 동락리와 화령장에서 연거푸 국군에게 참패를 당한 부대다.

사단장이 교체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 오른쪽에 형성된 14㎞의 간격을 이용해 아무런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이어서 제15사단은 5일 새벽 1시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국군 제8사단을 기습했고, 다음날 새벽 영천을 점령했다. 전광석화였다.

영천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대구(34㎞), 포항(40㎞), 경주(28㎞) 등으로 통하는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영천 장악은 아군의 중·동부전선 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낙동강 전선 전체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예상 진출로는 대구로 진출하여 제8군사령부 후방을 차단하거나 경주로 진출하여 부산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어느 방향으로 진출하든 유엔군 입장에서는 위기였으나 제15사단이 경주-부산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에 유엔군은 다소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하양-대구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대구가 포위되어 제8군의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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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초 낙동강 방어선 전선 상황.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졌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 북한군의 패착에서 이끌어낸 승리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지점인 영천이 돌파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소속의 제8사단을 제2군단으로 전환하여 영천 일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위기에 직면한 유재흥 제2군단장은 예하의 백선엽 제1사단장과 김종오 제6사단장을 소집해 각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영천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당시 제1사단과 제6사단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결국 제1사단 제11연대, 제6사단 제19연대가 영천지역으로 급파되어 북한군의 대구 진출에 대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은 대구가 아닌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때마침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는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영천 북방의 견부진지(전방 및 측후방을 통제할 수 있고 적의 진출에 있어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요충지)를 고수하면서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었다.

제6사단도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계속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김무정 북한군 제2군단장은 이번에는 북한군 제8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8사단이 신령을 돌파하지 못해 영천을 점령한 제15사단의 우측면이 노출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끝내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따라 상황은 오히려 후방 깊숙이 침투한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으로 바뀌었다. 반격태세를 가다듬은 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과 신편된 제7사단을 투입하여 9월 8일 오후 영천을 탈환했다.

9월 공세 당시 영천지역 전투는 8월 공세의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낙동강 방어전의 분수령이었다. 8월 초에 낙동강 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견고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9월 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낙동강전투

■ [인터뷰] 다부동 전투서 전쟁물자 옮긴 도용복 회장

"흰쌀밥 고봉으로 주기에 총알 날라
두려움보다 배고픔 고통이 더 컸지"

전 세계 190여개국을 다닌 오지여행가로 유명한 도용복(81·사진) (주)사라토가 회장은 건강하고 활기찼다. 대구 대백프라자 카페서 만난 그는 지인 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랜드호텔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고 했다.

도용복 회장은 음악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 다부동 전투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줄타기를 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 때였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피난길에 올랐고, 전쟁통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저와 어머니, 동생 등 네식구는 우여곡절 끝에 칠곡 다부동 고개를 넘었는데, 그때가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이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안동서 걸어 다부동까지 온 도용복 소년과 동생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어머니도 피난 온 타지서 자식을 챙겨 먹일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귀가 번쩍하는 희소식이 들렸다. 국군의 총알 나르는 일을 하면 흰쌀밥을 고봉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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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고지로 노무자들이 지게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이때부터 소년은 자기보다 큰 지게로 전투가 벌어지는 다부동 고지로 총알을 날랐다. 소년은 고지를 오가면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또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에게 물어보니 인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무서웠다. 그만하겠다고 했다.

도 회장은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죽음?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고픈 겁니다. (총알 나르는 일을) 안 한다고 작심하고도 아침이 되면 쌀밥 유혹에 또 가는 겁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소년에겐 죽음의 두려움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컸다. 아침 식전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거리의 고지에 나르고 오면 정말 혼자서는 다 못 먹을 양의 쌀밥이 나왔다. 집에서 굶고 있을 어머니와 동생 생각에 호박잎을 따 주먹밥 두덩이를 먼저 만들어 챙겼다.

그렇게 소년은 15일 정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부동 고지에 총알과 전쟁물자를 날랐다.

/매일신문=이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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