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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에요, 지금┃구효서 지음. 해냄출판사 펴냄. 284쪽. 1만6천800원
화가 모네는 '빛'을 이유로 루앙 대성당을 다양하게 그렸어요.
낯설게 표현하려면 끝없이 사유해야겠죠.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문인들의 고향에 자리한 어느 한적한 카페. 고소한 원두 향기가 커피의 씁쓸함을 한 번 더 음미하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곧바로 달콤한 셔벗 아이스크림을 한입 머금어 본다. 이내 군부 독재 아래 서슬 퍼렇던 1980년대와 그 속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사랑했던 청춘들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소설 '통영이에요, 지금'이 희미한 그 역사를 통영에 소환한 덕에 독자들은 평범한 도시, 익숙했던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사뭇 낯설어지는 '문학적 경험'을 하게 된다.

'슬로&로컬' 시리즈 세 번째 작품
통영 찾은 작가·카페 주인 이야기
80년대 시대적 배경 속 사랑 그려
이분법 피하고 다양성 띈 인물 눈길 

지칠 줄 모르는 글쓰기, 내로라하는 문학상들을 휩쓴 작가. 구효서의 40번째 소설이자 '요요'라는 제목으로 끝나는 '슬로&로컬' 시리즈 세 번째 작품, '통영이에요, 지금'이 독자들을 찾아왔다. 구 작가는 "벚꽃 피는 시점에 맞춰 쓴 건 아니고, 퇴고해놓은 지 1년이 훌쩍 넘은 글이다. 앞서서 냈던 '요요'로 끝나는 책들과 함께 엮을까도 고민했었다"고 설명했다.

소설은 통영을 여행 중인 37년 차 작가 '이로'와 그의 미각을 사로잡은 셔벗을 만드는 카페 주인 '박희린'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1980년대 주사파로 몰린 '주은후'와 그의 연인이 대공분실에 붙잡혀 들어가는 처참했던 시대상도 중간중간 등장한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이런 무거운 시대상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공안당국에 일조하던 경찰이 양심선언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책감이 아닌 붙잡혀 온 여성을 향한 '사랑'이었다.

스스로 '잡식성' 불러 "변덕이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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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 /김명년기자 kmn@kyeongin.com

"소설을 보면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절을 메인이 아닌 서브로 다루고 있어요. 단순히 비극적인 사실만을 전하지는 않죠. 세 청년이 있었는데 이들이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기묘한 사랑으로 얽혔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주된 걸로 삼고자 했어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면 독자들도 소설 속 인물들처럼 이내 주인공 '박희린'에 매료된다. 담담한 면모가 왠지 모르게 매력적이다. 구 작가는 일본 배우 故키키 키린(樹木希林·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페르소나)을 떠올리며 '박희린'을 구상했는데, 초고에선 이름도 '희림(林)'이었다고 한다. 키키 키린의 이름 끝 한자를 따온 것이다.

구 작가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입장이 강해지면 단정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나름대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건데, 사람에 대한 감정조차 이분적으로 나눈다"며 "'희린'은 무슨 말을 해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삶의 아이러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구효서는 뚝심 있게 다작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다작하되 다양성의 끈은 놓지 않았다. 관념과 현실, 대중 문학과 순수 문학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스스로를 "잡식성"이라 칭하는 그는 "변덕이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화가 모네는 아침과 저녁때의 다른 '빛'을 이유로 '루앙 대성당'을 다 다르게 그렸어요. 일상에서도 전날 읽었던 책, 영화가 똑같은 작품인데도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보일 때를 마주해요. 그동안 못 봤던 것들이 차츰 보일 때부터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죠. 결국 다르고 낯설게 표현하려면 끝없이 공부하고 사유해야겠죠."

매일 오전에는 원고지 12매 분량을 쓰고,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한다는 구효서. 해가 뜨기 시작하는 아침이 가장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라는 그는 최근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집필에 열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절에 들어간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차기작에는 또 어떤 '사랑'이 담겨있을까.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