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은 대한민국 공립박물관 중 보물급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무려 227점에 달한다. 최근 5년간은 인력·예산 부족 때문에 보물 신청작업을 전혀 진행하지 못했지만, 만약 밀린 작업을 다 끝내면 보물급이 300점에 육박할 거라고 학예직원들은 말한다.
그런데 그 대단한 유물들의 상당수는 구입품이 아니다. 개인 또는 가문이 집안 대대로 전해 온 것을 경기도박물관에 내어놓은 기증품이다. 보물 930호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첩'과 보물 1630호 '숙종어필 칠언시'도 그중 하나인데, 모두 조선 후기의 명재상 이경석(李景奭·1595~1671)과 관련 깊다.
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왔다. 이에 인조는 1만4천여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서 옹성하다가 이듬해 1월 30일 송파 삼전도로 가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예절(三拜九叩頭禮)을 행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항복 기념비를 세우되 비문도 조선이 직접 지으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비변사는 글솜씨로 소문난 4명에게 비문을 의뢰하였는데, 모두 자신은 빼달라고 상소하였다.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라는 이유, 예조판서 장유는 몸이 아프고 어머니 상중이라는 이유, 전형조판서 이경전은 나이가 80세를 바라보므로 글짓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전경상감사 조희일은 상소하지 않았지만 탈락되도록 일부러 글을 난삽하게 지었다고 한다.
인조는 이경석과 장유의 글을 뽑아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는 이경석의 글을 몇 번이나 수정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인조가 이경석에게 간절히 부탁한 것으로 알려진다.
비문은 1638년 7월에야 청나라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43세였던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촌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걸 후회한다'는 편지를 쓰고 시에 '1백 길 절벽을 짊어졌다'고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1650년에는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운동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영의정으로서 홀로 책임을 지고 사형을 앞두었다가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염려한 이경석의 은퇴를 임금들은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668년 그가 73세에 이르자 현종이 팔걸이 의자와 지팡이를 내려주고 잔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기념케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보물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첩'이다.
이경석이 죽은 뒤 자손과 문하생들은 그의 글을 모아 '백헌집(白軒集)'을 간행하였다. 나중에 숙종이 문집을 읽고 이경석의 충성심과 애국심에 감동 받아 칠언율시로 찬미한 것이 바로 보물 '숙종어필 칠언시'이다. 이처럼 유물에 담긴 사연을 알고 나면 유물을 보는 눈,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의 삶은 어떠한지 되돌아보게 된다.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