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와 인터뷰 중인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 교수는 그간 경기 지역의 역사 속 소외된 인물과 사건을 발굴해왔다. 2023.5.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역사가가 전하는 한 마디마다 그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해요. 그만큼 역사에 대해 어떤 주의주장을 내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곧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 역사학자의 연구실 문을 열자 헌책방에서 날법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겼다. 낡은 책상 옆으로는 빛바랜 장서들이 빽빽이 쌓여 있었다. 수많은 검증 잣대를 거쳐 탄생한 이 역사책들 한가운데서, 정년퇴직을 앞둔 노교수는 "섭섭함보단 시원함이 크다"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지만 전문 분야인 역사에 대해 말할 때면, 그는 오히려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고르는 듯 천천히 답변을 들려줬다.
한국전쟁 아픈 역사 국민방위군 화성 지역 3·1 운동·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대중들에게 알려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징집에 응해 전장에서 일기를 기록한 고 유정수 씨가 남긴 당시 신분증과 일기장 등 유품. /경인일보DB
지난 2003년 3·1절 84주년을 앞두고 화성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36명의 사진이 발굴됐다. 박환 교수는 '화성시 3·1운동 유적지 학술조사단'을 이끌며 화성지역 독립운동가의 수형 카드를 일일이 조사한 끝에 36명의 사진을 입수했다. 이를 통해 화성지역의 3·1운동사를 새롭게 밝혀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경인일보 2003년 2월 21일자 1면에 보도됐다. /경인일보DB
이미 흘러간 먼 과거를 되짚어 진실을 찾아가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다. 문헌 자료는 한정돼 있고, 증언을 통해 듣는 구술 자료는 신빙성과 타당성을 끝없이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술자가 본인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 설명을 다르게 할 수 있는 탓에, 일부러 한 달에서 두 달 간격을 두고 인터뷰를 재차 진행하기도 한다. 박 교수는 이런 역사가의 숙명에 대해 "가장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바깥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문헌 자료를 토대로 구술 증언을 듣고 현장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문헌 자료들이 살아 움직여요. 오래된 글자들이 눈앞에서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죠. 그저 자료 뭉치였던 문헌이 '동적인 역사'가 된달까. 그만큼 현장 답사를 많이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자료를 정확하게 해독해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이런 역사가의 주요 덕목 중 하나는 다양한 시각에서 치우침 없이 과거를 바라보는 태도다. 다만, 이는 그저 기존의 통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에서 벗어난 주장을 '새로운 관점'인양 호도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지난 2015년 극우 논객 지만원씨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찍힌 한 사진을 근거로 북한군 개입을 주창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씨는 페퍼포그 차량에 올라탄 남성을 북한에서 온 '제1 광수'라고 지목했으나, 이 남성은 경기도에 사는 평범한 시민이던 차복환씨로 밝혀졌다. 차씨는 지난 1980년 전남 광주에서 공장을 다니던 중 시민군에 합류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역사적인 주장을 하는 건 늘 조심스럽다. 본인의 주의주장을 내세우려면 치밀하게 자료 조사를 하는 건 물론, 주변 전문가를 상대로 수없이 발표해 검증받는 게 기본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역사를 공부한다"고 답했다.
"현장 답사·사람들 만남 정확한 해독 가능"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역사 공부" "독립운동가 영웅적 측면 아닌 활동 보려해"
지난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김군' 속 한 장면. 다큐멘터리 '김군'은 극우 논객 지만원씨가 지목한 '제1 광수'를 비롯해 북한군이라 호도되는 무수한 '광수'들을 추적해 간다. 지난 2022년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통해 지만원씨가 지목한 해당 남성이 경기도에 거주하는 차복환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지역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역사 속 잊힌 존재들'을 좇던 박 교수의 시선은 어느새 '디아스포라'를 향해 있다. 이미 해외로 이주한 수원과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연구했던 그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서인 듯 보인다. 그는 "그동안 독립운동사는 애국·민족주의를 토대로 특정 인물의 영웅적인 측면만 강조해왔다"며 "대중에게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어디로 이주했고, 이방인 정체성을 품고서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평화 같은 보편적 차원의 인권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박환 교수가 그간의 소회와 연구 과정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3.5.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오는 8월, 그는 37년 동안의 대학 교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밥벌이의 굴레에서 벗어난 직장인으로서는 후련함이 엿보였으나, 역사학자라는 직업인으로서 전한 마지막 소감은 왠지 모르게 묵직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에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데서 나오는 무거운 책임감이겠죠. 퇴임 후에도 소외된 역사를 계속 발굴하고, 더 폭넓은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