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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효서.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소설가 구효서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와 대중적 이야기를 오가는 작가. 인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산 그의 도시적 감수성이 나오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유년기를 보낸 인천 강화도의 토속적 정서가 나온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편 '풍경소리'(2017·이상문학상 대상)에선 도시적 분위기와 토속적 정취를 결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신작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아기자기하고 애틋한 로맨스다.

1957년 창후리서 2남4녀중 막내 출생
창교동 일대 '능성 구씨들' 모여 살아
활력 넘친 우시장… 용돈 받고 소몰이
15세때 가족 서울로 "산업사회 점프"

1987년 중아일보 신춘문예 '마디' 등단
고향 소재로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젓국찌개' 추억
다시 찾은 옛집, 어린시절 글씨 그대로

고향하면 떠오르는 별립산 '역사 무대'
"강화는 한반도의 무언가 소중함 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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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 점토처럼 쌓여 정서의 토양이 된 강화도


구효서는 1957년 9월 18일 오전 10시 6분 45초께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말에서 2남 4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적은 창말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창후리 사태말이다. 구효서가 나고 자란 마을은 하점면 창후리와 이강리, 양사면 인화리에 걸쳐 있는 별립산(해발 399.8m) 끝자락이다. 마을 서쪽으로 창후리 포구를 낀 강화군 본도의 북단이자 접경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창말, 사태말을 아우른 지역의 공식 지명은 창교동(倉橋洞)이었다. '청해 이씨'와 '능성 구씨'가 많이 살았다. 구효서가 바로 능성 구씨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이 창교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구효서는 지금도 해마다 4월 진달래 필 무렵 부모님 묘에 성묘하러, 추석과 설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끔 혼자 밴댕이를 먹으러 고향에 온다.

"태어나서 처음 맞은 세계가 강화도였습니다. 저에게 최초로 각인된 세계이자, DNA라고 할 수 있겠죠. 집에서 학교(강후초등학교) 가는데 10리(약 4㎞), 오는데 10리를 6년을 걸어 개근했어요. 보이는 게 하늘, 바다, 산 이 세 개밖에 없었어요. 매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한테 차곡차곡 마치 점토같이 쌓이잖아요. 그게 정서의 토양이 되는 겁니다."

어린 시절 교동도에서 소 장수들이 소 떼를 배에 싣고 창후리 포구에서 내려 강화읍 우시장으로 끌고 갔던 기억이 흥미롭다. 소 장수들은 구효서 같은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한두 마리를 강화읍 우시장까지 몰고 가게 했다고 한다. 구효서는 "소만 오면 아이들이 창후리 포구에 새까맣게 몰려 소를 먼저 차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인천강화옹진축협에 따르면 강화읍 남산리 현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있던 우시장은 1995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강화 우시장은 1930~1950년대 현 강화읍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다가 서문 밖 인삼 수납장 공터로 이전해 1970년대까지 운영됐고, 이후 남산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1948년 강화문화관이 펴낸 향토잡지 '강화' 제1호(2007년 강화문화원 복각)를 보면,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사육한 가축은 소 4천365마리, 돼지 5천596마리, 닭 2만8천571마리에 달했다.

교동도에도 우시장이 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 교동도의 생활권은 강화도가 아닌 황해도 연백군과 개풍군 등지였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형성한 시장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우시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한기출(74) 교동향교 전교는 "교동도와 연백군은 간조 때 우마(牛馬)가 지나다닐 정도로 물이 빠져 배를 타지 않고도 소를 몰 수 있었다"며 "교동의 소가 강화도로 간 것은 휴전선으로 북쪽 왕래가 막힌 이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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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기억을 되살려 가며 쓴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1995) 시절, 태어난 집에서 촬영한 사진. 큰 누님 가족과 함께 살았다. 뒤로 보이는 문 안쪽이 안방이고, 그곳에 지금도 단편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의 모티브가 된 시계가 걸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아랫줄 맨 왼쪽이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

■ 결국엔 다시 쓰게 될 고향 이야기


1972년 열다섯 살부터 삶의 무대는 강화도에서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으로 이동한다.

"가족들은 공단으로 일하러 나가고, 저는 학교에 다녔어요. 강화도에서는 농경사회니까 일과 삶이란 게 구분이 안 됐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노래도 하고 사물놀이도 하고 퍼져 앉아서 농담도 하고 그러잖아요. 서울 가니까 딱 분리가 돼서 그런 낭만이 없어졌어요. 가족도 밤에만 만나고, 집에선 잠만 자고, 아침이면 다 직장으로 가니까 이상한 거예요.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껑충 점프하고 나니 정말 삭막하더라고요."

구효서는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했다.

구효서가 2021년부터 잇따라 쓴 장편 '옆에 앉아서 울어도 돼요?'(2021·해냄), '빵 좋아하세요?'(2021·해냄),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작가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은 '요요 시리즈'로 통칭하는데, '슬로 시티·라이프·푸드'(Slow City&Life&Food)를 표방한다. 앞으로 '요요 시리즈'에 고향 강화도가 포함될지 물었다. "당연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요요 시리즈' 강화도는 어떠한 음식이 등장할까.

"술 먹고 술병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피로회복제로 먹는 음식이 젓국찌개입니다. 돼지고기와 두부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새우젓으로 끓이는 음식이죠. 어머니는 고기가 귀한 시절 그냥 새우젓만 넣고 끓였습니다. 대신 매운 고추 송송 썰어서 칼칼하게 해서 그거 먹으면 기운을 차리게 돼요."

강화도 앞바다에선 해마다 2천400t가량의 젓새우가 잡힌다. 가을에 잡아 젓갈을 담그는 '추젓'의 전국 생산량 70%가 강화도에서 나온다. 그 옛날 먹을 것이 부족해도 새우젓만큼은 넉넉하게 있었다고 한다. 강화도 가정집에서 만든 젓국은 따로 정해진 조리법이 없었다. 호박이 나는 집에선 호박을, 감자를 심은 집에선 감자를 넣고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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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강후초등학교 교정에서 촬영한 사진. 오른쪽 두번째 소년이 구효서다. /구효서 작가 제공

■ 떠나 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고향


구효서가 강화도에 대해 쓴 작품 가운데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유년기가 아닌 현재 시점이다. 그가 생년월일에 더해 '분초'까지 세게 된 이유가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구효서는 마흔일곱이 되던 해 창말 옛집을 다시 찾는다.'ㄱ'자로 지어진 한옥은 구효서의 아버지가 혼자서 행랑채(대문간 옆 집채)를 지어 'ㅁ'자 됐다. 2023년 현재까지도 그 집은 폐가로 남아있으나, 행랑채는 폭삭 주저앉았다.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고자 문 양쪽에 세운 기둥)에는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할 때 쓴 '구효서'란 글씨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부뚜막과 아버지가 만든 나무 책상도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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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가 살았던 창말 옛 집. 지금은 폐가로 남아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고향집에 살던 시절 행랑 창문 밖으로 넓은 간척지와 서해가 보였고, 바다 건너 석모도와 교동도가 보였다고 한다.

구효서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침 햇살이 막 방문 문턱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고 했다. 마흔일곱 생일 아침, 구효서는 고향집 안방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햇살이 방문 턱에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시각은 정확히 오전 10시 6분45초였다.

구효서는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별립산을 떠올린다. 별립산과 강화도는 가깝게는 분단의 현장이면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미국, 프랑스, 일본과 국제전을 펼친 전선이고, 병자호란과 대몽항쟁을 치른 공간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구효서는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곳이 역사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내가 어릴 적 봤던 산과 지역이 역사 속에서 가늠되는 좌표들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그런 알 같은 공간이 예나 지금이나 강화도"라고 말했다.

순의비

■ 한국전쟁 아픔 담은 '강영뫼 순의비'

창후리 민간인 학살 희생 73명 위령비
구효서 "고향 이야기 쓰면 등장할 것"


소설가 구효서의 고향인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에서 양사면 인화리로 넘어가는 중외산 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주요 민간인 학살 현장이다. 강화도에선 중외산을 강영뫼라고도 부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을 규명한 '강화 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1950년 9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사이 강영뫼에서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강화도 전역에서 붙잡아 온 주민 43명을 구덩이(참호)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 사건은 1966년 창후리 간곡노인회장을 맡던 이병년씨가 심도직물공업 김재소 사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게 지원받아 '강영뫼 73인 순의비(殉義碑·사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알려졌다. 순의비는 창후리 선착장 인근 언덕에 세워졌다가 1981년 도로 공사로 인해 송해면 하도리 강화유격용사위령탑 인근으로 옮겨졌다.

순의비에 쓰인 희생자 73명은 이병년씨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밝혀낸 명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순의비 명단 73명 가운데 일부는 개성 송악산으로 끌려가 희생됐다. 현재 순의비는 잡초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고 있지만, 1970년대엔 반공의 표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어릴 적 구효서와 동네 사람들은 강영뫼를 지날 때 보이는 학살 장소를 '80년 구덩이'라고 불렀다. 80년이 된 구덩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80명이 학살당한 구덩이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2008년이 돼서야 정확한 희생자 수와 당시 상황이 조사됐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을 몰랐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것이다.

구효서 큐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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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는 "친구들과 그곳을 지날 때 늘 마음을 졸이곤 했다"며 "앞으로 강화도 이야기를 쓰면 80년 구덩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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