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은유 지음. 읻다 펴냄. 262쪽. 1만8천원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는 호영·안톤 허·소제·승미·알차나·새벽·박술 모두 일곱 한국시 번역가를 만난다. 이들은 모두 '시에 도착하는 사람들'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용한 일에 무수한 시간을 들이는 순수한 사람들.
두 문화 이쪽 저쪽을 오가며 자기 언어를 찾아내는 게 번역가의 일이다. 경계인인 셈인데, 퀴어도 그렇다. 번역가 일곱 중 셋이 퀴어다. 번역가는 두 문화 사이에서 자기 언어를 찾고, 퀴어는 자기를 설명할 언어를 찾아냄으로 사회에서 처음 탄생한다.
은유는 "이야기가 없다는 건 존재가 안 보인다는 뜻이거든요. 많이 접해야 익숙해지고 그래야 구성원으로 살 수 있어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은 자기 언어를 찾고 싶어서 문학을 해요. 내가 퀴어다. 성소수자다. 이렇게 정체성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누구인가 사회에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절실함이 문학에 몰입하게 한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속한 문화에서 언어를 찾지 못해서 다른 문화권에서 자기 언어를 찾아오는 거죠"라고 말했다.
엄마로부터 내려온 결핍, 다른 문화권에서 가해지는 차별과 멸시, 세상에 대항할 공동체에 대한 욕망. 주의력 결핍 장애라는 한계. 번역을 추동하는 힘은 저마다 다르다.
"안톤은 동양인에 대한 멸시를 경험했기 때문에, 동양 남자애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경험했기에 이야기를 하고 싶어 번역을 시작했어요. 어찌보면 운동적인 의미가 강한 거죠. 어떤 결핍은 노력으로 메워질 수 있어요. 부자가 되면 가난이 사라지는 것처럼. 피부색·성 정체성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거죠. 노력으로 바꿀 수 없을 때는 세계를 바꿔야 합니다."
한국시 번역가 7명 이야기… 두 문화 오가며 '세계에 저항'
퀴어·결핍·차별 등 혼돈과 불확실성에 스스로 내던져가며
사랑과 감탄의 단어로 변화 추구… "번역에 정답은 없다"
세계를 바꾸는 무기는 시다. 사랑과 감탄의 언어로 세계를 바꿔낸다. "번역은 정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으니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남죠, 불확실성에 자기를 던지니 외로운 일이기도 할 겁니다."
은유는 이렇게 썼다. '시 독해와 번역은 정답이 없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번역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공기와 언어에 짓눌리지 않았다. 외려 시는 정답에 저항하는 장르라서 해 볼만 하고 무언가를 이겨내는 힘은 공동체에서 나온다는 소신에 따라 게릴라처럼 시 번역가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9P)
번역가 일곱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일곱 색깔을 뿜어내는 사랑의 송가, 환희의 언어다. '시에 도착하는 사람들'인 번역가는 한국시에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고, 피가 빠르게 도는 경험'(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27P)을 하고 번역을 한다.
은유의 전작 '출판하는 마음'(2018)을 보고 난 뒤라 책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책엔 번역가의 얼굴, 인터뷰 사진이 실려 있다. 한 존재의 면모를 넌지시 들여다볼 수 있는 해사한 얼굴 사진이 많지만 때론 손동작만 제시한다. 미색의 종이 재질, 얇고 흐릿한 글자 폰트에 사진이 섞이고 심장에 손을 내미는 저릿한 한 줄 문장이 어우러져 '책'이라는 존재로 조립된다.
변방과 경계야말로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라며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를 언급하곤 다음 챕터를 "결국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가즈오 이시구로)이라는 말로 여는 식이다. 경계인의 말로 두 경계인(번역가)을 잇는다.
이 책은 아름답다. 은유의 권고대로 볼펜을 꺼내 잡고 죽죽 밑줄을 그어가며 책장을 접어가며 식탁에서 욕조에서 책상에서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한 저술 노동가의 글이 빚은 황홀한 무지개 풍경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시를 읽어야겠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