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냉전시대의 피란수도에서 21세기 평화도시로 변신을 꿈꾸는 부산이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일까.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지금, 되새겨 봐야 할 정전 70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짚어본다.
5월 국내 최초 '근대유산 분야' 잠정목록 올라가… 2028년 최종 목표
경무대·임시중앙청·유엔 묘지·우암동 소막 주거지 등 9곳 '연속 구성'
보완 연구·시민들 지속적 관심 필요… 지자체·주민 반대 등 해결 과제
삼성·LG 등 대기업 성장 발판 역할… '위기 극복' 콘텐츠 후대 알려야
"수십만 피란민 품어준 당시 이야기, 높은 인문학·산업적 가치 보유"
■ 세계유산 등재 어디까지 왔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지난 5월 16일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홈페이지의 잠정목록에 게재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온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인 한국전쟁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 1천23일 동안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다. 피란수도의 정부 유지, 피란 생활, 국제협력의 기능을 하는 9개 연속 유산으로 구성된다.
먼저 서구에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3곳이 있다. 중구에도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3곳이 있다. 남구에 유엔묘지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2곳이 있고, 부산진구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우선등재목록 선정, 예비심사, 등재신청후보·등재신청대상 선정, 유네스코 현지실사 등을 거쳐야 한다. 등재 요건에 필요한 보완 연구와 개별 유산의 보존 노력, 시민과 관계 기관의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일부 지자체와 주민 반대는 극복해야 할 과제다. 중구 곽해웅 광복동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중구가 명색이 관광특구인데, 문화재로 인해 고도제한 등 각종 개발에 제약이 많다"며 "중구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1부두 세계유산 등재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중구의회 강희은 의원은 "원도심 내 문화유산이 가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면서도 "1부두 부지 등은 결국 주민이 활용해야 할 시설인데, 주민 의견을 듣는 과정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 김기환 문화체육국장은 "시간을 갖고 중구청, 중구 의회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 주민 의견도 수렴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세계유산 등재에 앞서 시민들에게 피란수도 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아대 김기수 건축학과 교수는 "문화유산이 시민에게 혐오 대상이 되지 않도록 먼저 시민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며 "또 국제 심포지엄 개최 등을 통해 부산시가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행정력을 낭비하는 불상사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위기 극복 역사를 콘텐츠로
=피란수도와 관련한 유형의 자산을 남기는 것과 함께 무형의 가치를 이어나갈 필요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전쟁 시기는 물론, 전후 경제 성장과 위기 극복의 중심에 부산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성과 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과 LG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대표적이다.
경성대 강동진 도시공학과 교수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대표 기업들의 뿌리가 부산 서면에 있었다"며 "고려제강이 옛 공장을 'F1963'이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꿔 부산 시민에게 환원한 것처럼, 대기업들도 창업 당시 기업의 흔적을 연결하고 부산의 역할을 후대에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시기 피란수도였던 부산이 2030 월드엑스포 유치 도시로 나서기까지의 발전상은 그 자체로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피란민들에게 기꺼이 방 비워주기를 했던 부산 시민의 이야기와 참전국 용사들의 안식처가 된 세계 최초의 유엔묘지 등은 다크 투어리즘(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소재가 된다"며 "피란수도 관련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예산을 투입해 미래 먹거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란민들이 전쟁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 나간 삶의 과정이 현재를 사는 우리나 미래 세대에 시사하는 인문학적 가치도 크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아미동 비석마을의 경우 묘지를 삶터로 바꾸어낸 피란민들의 이야기에서 내게 주어진 환경 속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극복의 과정을 배울 수 있다"며 "산복도로의 독특한 경관, 피란민의 음식 같은 특이성에 주목해 이를 관광 상품화만 할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품어준 부산 시민의 포용력, 역사적 아픔을 딛고 일어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향후 콘텐츠 산업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는 선자의 이야기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 '파친코'의 사례처럼 피란수도 부산의 이야기가 가진 산업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 발굴, 개발 노력도 필요하다. 피란수도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지원과 문화예술사적 가치에 대한 대중 홍보 필요성이 제기된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시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관계자들도 피란수도 문화예술 중심지로서의 부산에 대해 너무 몰라 안타깝다"며 "근대 미술 작가들의 삶과 작품, 다방 관련 이야기 등을 다룬 책 '살롱 드 경성'과 같은 베스트셀러가 부산에서도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손희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