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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재해·재난 등 참상이 벌어진 장소를 여행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한국에선 아직 낯설지만, 해외에선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여행 방식이다.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거나 경관이 수려한 장소로 향하지 않고 굳이 어두운 기억을 찾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교훈과 성찰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 전쟁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국제 정세에서 더욱 주목받는 여행 방식이기도 하다.

국립국어원은 다크 투어리즘을 대체할 우리말로 '역사교훈여행'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크 투어리즘 장소 대부분은 볼품없거나 오히려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전쟁과 갈등, 재해·재난의 '기억'이다.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기획 취재를 위해 지난달 독일 베를린을 찾았다.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의 통일을 기념하는 '통일기념일'인 3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크 투어리즘 장소인 '베를린 장벽'을 비롯해 전쟁과 분단 역사를 담은 현장을 답사했다.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고 만져보면서 인천에 있는 부평 미군기지 '캠프 마켓'의 옛 일본육군조병창(군수공장) 병원 건물이 떠올랐다. 여전히 존치·철거 논란이 가시지 않는 조병창 병원 건물을 포함한 캠프 마켓 전체를 베를린 장벽에 견줄 다크 투어리즘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봤다.

영광스러운 역사나 경관 수려한 장소 아닌
일부러 어두운 기억 찾아 나서는 여행방식
전쟁의 불씨 살아나는 국제정세에 더 주목

분단·나치 아픈 흔적 그대로 남겨둔 독일
'다시는 일어나선 안될 역사' 메시지 전달

가치 높은 인천 캠프마켓 조병창 병원 건물
얼마 안 남은 유산인데 철거··존치 논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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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찾은 독일 베를린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 보존돼 있는 장벽. 2023.11.3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다크 투어리즘 성지 베를린

1961년 동독이 동베를린 서쪽 경계선에 기습 축조, 국경을 봉쇄한 베를린 장벽은 독일의 분단과 냉전을 상징한다. 1989년 11월 9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직접 장벽을 허물었는데, 냉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유명한 장면이다. 장벽은 모두 허물어지지 않았다. 베를린 곳곳에는 장벽이 남아있고, 일부는 갤러리로 활용되는 등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

통일기념일에 방문한 '베를린 장벽 기념관'은 가장 길게 남은 장벽을 활용한 공간이다. 약 300m의 장벽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장벽의 흔적을 전시한 1㎞의 공원이 조성돼 있다. 철골이 드러났거나 그래피티(Graffiti)로 채워진 언뜻 폐허 같은 장벽을 보러 온 국내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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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찾은 독일 베를린 '베를린 장벽 기념관' 내부에는 공원과 함께 장벽을 넘다 희생된 이들의 추모 공간이 조성돼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단체로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 장벽 기념관 주변을 답사하는 프로그램도 눈에 띄었다. 기념관 맞은 편은 박물관과 전망대가 있어 장벽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고, 일부 장벽은 옛 동·서 베를린처럼 출입할 수 없게 완전히 막아 분단 상황을 느끼도록 했다.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장벽을 넘다가 희생된 이들의 사례와 추모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공원처럼 여유롭게 거닐면서도 장벽이나 그 흔적의 역사를 기록한 안내판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 많았다. 건물 벽면에는 바로 그 장소에서 장벽이 생기기 전, 장벽을 세울 당시, 장벽이 점점 두텁고 견고해지는 과정, 장벽 철거 이후를 비교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건물 벽면 자체가 장벽 일부로 쓰인 건물, 땅속에서 장벽을 통과하려고 판 지하 통로, 국경을 넘는 급박한 순간 등을 담은 기록이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전시돼 있다. 전쟁을 반성하는 메시지를 담은 '화해의 교회'도 건립돼 있다. 기념관 주변 조용한 주택가와 역사 유적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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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공간에 조성된 박물관 '공포의 지형학' 외부에 장벽과 함께 나치의 만행을 기록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베를린은 분단 역사만 전시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 시절 부끄러운 역사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베를린 중심가 포츠담광장 인근에는 '공포의 지형학'(Topographie des Terrors)이란 공간이 있는데, 나치 친위대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 본부가 있던 곳이다.

나치 독일 당시 게슈타포가 저지른 인종 학살과 참혹한 만행을 기록한 박물관을 조성했고, 야외엔 베를린 장벽을 80m가량 남겨 그 끔찍한 사진과 자료를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건물 흔적도 그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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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중심가 한복판에 조성된 '홀로코스트 추모비'.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포츠담광장 북쪽으로 가면 나치에 학살당한 유대인의 넋을 기리고자 2천711개의 석관을 세운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나온다. 베를린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 현관 앞 인도에 사람 이름이 새겨진 황금색 현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집에 살다 나치에 붙잡혀 끌려간 유대인들의 이름이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를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전쟁과 분단 유적으로 보존하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베를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이슈앤스토리 조병창
인천 '캠프 마켓' 내 일본육군조병창 병원 건물. 토양 오염 정화 등으로 인한 철거·존치 논란이 진행 중이다. /경인일보DB

■ 식민지·전쟁·분단 기억 다 가진 캠프마켓


한반도 또한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식민지, 전쟁, 분단의 상처가 깊다. 그러나 그 상흔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장소와 유산은 많이 훼손됐거나 상당수 사라졌다.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인천 캠프 마켓은 한반도 식민지·전쟁·분단 역사를 온전히 보존하고, 국내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몇 안 남은 '기억 유산'이다. 캠프 마켓에는 조병창 병원 건물을 비롯한 수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남아있다.

캠프 마켓의 전신 조병창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1939년 부평평야에 조성하기 시작해 1941년 완공한 초대형 군수공장이다. 조병창은 제2차 세계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한반도 병참기지화 핵심 지역이었다.

일본은 중국 사찰에서 건너온 철제 범종부터 민가의 숟가락까지 온갖 쇠붙이를 공출해 조병창 제련소에서 녹여 전쟁에 쓸 무기를 찍어냈다. 그때 제련소로 추정되는 굴뚝 2개짜리 대형 건물이 현재 캠프 마켓에 남아있다.

캠프 마켓 내부에 조병창 병원 추정 건물이 있는데,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치료를 받던 공간이었다. 국사편찬위 구술사료집에 따르면,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명단 1만2천584명이 확인된다. 실제론 더 많을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조병창 병원 건물은 현재 지역사회에서 토양 오염 정화를 이유로 철거하자는 쪽과 어떻게든 역사적 가치를 담은 건물을 존치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어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캠프 마켓 맞은편 부평공원(미쓰비시 군수공장 터)에 일본의 위안부 동원 만행을 고발하는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징용 노동자상'이 서 있는 이유다. 캠프 마켓의 지하를 포함해 주변 지역에 일본군이 조성한 23곳의 땅굴이 있다. 캠프 마켓과 연계하면 다크 투어리즘 코스로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해방 직후 미군은 조병창 자리에 주한미군 군수 보급기지 '애스컴'(ASCOM·제24군수지원사령부)을 조성했다. 인천항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오는 미군 물자를 총괄하는 기지로, 그 주변엔 남한 최초의 기지촌이 형성됐다.

애스컴은 한국전쟁 이후 '애스컴 시티'라고 불릴 정도로 확장을 거듭했고, 기지촌도 커져 '신촌'이란 마을까지 생겼다. 부평 기지촌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과 클럽, 미용실, 세탁소 등이 성업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아픈 이야기가 서린 곳이며, 한편에선 미군 클럽에서 공연한 밴드를 중심으로 한국 대중음악이 싹을 틔웠다. 이와 관련 캠프 마켓에서 일부 개방된 공간에 인천음악창작소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슈앤스토리 조병창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인천 부평구 캠프마켓 전경. /경인일보DB

1970년대 이후 부평 미군기지가 현 캠프 마켓 면적으로 축소됐고, 캠프 마켓마저 평택 미군기지 등지로 이전하면서 건축물 등 이젠 흔적만 남았다. 한국과 미국은 캠프 마켓 전체 부지에 대한 반환 절차를 거치고 있고, 토양 등 오염정화작업도 진행 중이다. 캠프 마켓은 곧 완전히 개방되지만, 내부 건축물을 얼마나 보존하고 무엇으로 활용할 것인지 구체적 계획이 마련되지 않았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 2021년 보전 대상지를 선정하는 '이것만을 꼭 지키자!' 특별상에 조병창 병원 건물을 선정했다. 강제동원 역사가 서린 공간으로 보존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부산시는 2015년부터 옛 미군 하야리아기지(현 부산시민공원), 유엔묘지, 피란 주거지, 임시중앙청 등 전쟁 유산을 묶은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왔다. 최근 세계유산 등재 전 단계인 잠정목록에 오를 정도로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인천은 캠프 마켓의 기억 유산들을 그대로 보존해 활용할 것이 옳을까 아니면 상당수 없애서 확보한 토지에 새로운 것들을 조성하는 게 옳을까. 베를린과 부산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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