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쏘아올린 '김포시 서울 편입' 논란이 난리다. 해묵은 논쟁인 줄 알았던 경기남·북도 분리 논의가 민선8기 들어 본격화됐고, 경기북부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전보다 훨씬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행정구역 개편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산업화시대가 종식된 후 보수·진보 할 것 없이 국토 개발에 대해선 '균형'에 방점 찍은 지 오래됐고, 최근엔 지방소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정책적 숙의 과정 없이 일단 '던지고 본' 측면이 강해 '서울시민'이란 타이틀을 미끼 삼아 수도권 민심을 잡으려는 총선카드로 오해받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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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승격 이후 인구와 각종 시설증가 등 시세가 확장되면서 수도권 신흥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는 김포시 시가지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일단 논란 자체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경기도 뿐 아니라 인천까지 들썩이며 수도권을 헤집고 있다. 모두 가능한 이야기일까, 과연 그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궁금이 커졌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열심히 옛 기사를 뒤져보았다. 그리고 김포군 검단면에서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이 된 사연을 찾았다. 서울시 김포구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검단동의 과거와 현재는 엿 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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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9월 8일자 경인일보 '인천광역화 경기·인천 입장' 기사에는 경기와 인천의 행정구역 개편 문제가 보도됐다. 이때의 시작은 인천 '광역화'를 통해 수도권 서부벨트를 개발하고 '21세기 환태평양 경제권 중핵도시'로 성장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무부는 김포군, 옹진군, 강화군, 시흥시 전역을 포함하는 안과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양촌리 일부를 포함하는 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편입을 반대하는 경기도와 찬성하는 인천시를 사이에 두고 내무부의 고민이 깊다는 게 기사의 골자다. 여기서 눈 여겨볼 건 이 대목이다.

'한편 경인지역 정치권에서는 양 지자체간의 영역분쟁에 일체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추이를 관망한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이 개입할 경우 국가경쟁력 강화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행정구역 개편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판단때문. 이와 관련 정치권에서는 양 지자체간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협의와 지역주민의 여론을 존중하는 타협안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필요할 경우 조정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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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군은 수도권 제1의 전원도시로 급부상해 가고있다. 사진은 김포읍 북변 택지개발지구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군민보다 직할시민이 좋은가봐
당시 정부는 주민의견조사에 나섰다. 주민들이 찬성하면 인천 광역화에 편입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갑론을박 끝에 당시 김포군은 검단면만 주민의견조사를 실시했고 강화·옹진군은 군 전체가 참여했다. 결론은 '편입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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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견조사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한  1994년 9월30일자  '압도적 찬성에 "역시 군민보다 직할시민이 좋은가봐"' 기사가 있다. '인천시 편입에 대한 찬성의견이 압도적인 표차를 보이자 개표장에 나와있던 공무원들은 "예상했던 일"이라며 즐거운 표정. 특히 파견된 일부 공무원들은 "역시 군민보다는 직할시민이 좋은 모양"이라며 강화군 인천편입을 기정사실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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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6일. 서울과 인접한 위치에서 급성장을 하고있는 김포군은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재정확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경인일보 아카이브

또 찬성의견이 우세하게 나오자 당시 김포군의회 검단면 군의원은 "인천시로의 편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군의원으로서 책임을 통감, 사의를 표한다"며 전격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통합 지역들의 기대감도 넘쳤지만 불안도 공존했다.  1994년 9월30일자 '지역발전 가속계기 환영' 기사에는 '29일 주민의견조사에서 인천시 통합지역으로 결정된 강화, 옹진(대부면 제외), 김포(검단면) 지역주민들은 이번 통합이 그동안 낙후됐던 이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며 크게 반겼다.

주민들은 해양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강화 옹진 김포지역이 인천시와 동질적인 요소가 많으면서도 편향된 개발로 인천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됐었다며 이번 통합을 계기로 인천시가 앞으로 2000년대 중추도시로 발전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번 통합으로 지역간의 갈등은 물론 농촌지역 투자기피와 혐오시설 유치 등 광역도시 운영에 따른 역기능이 파생될까 우려된다는 표정이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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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95년 3월 1일 김포군 검단읍과 강화·옹진군이 인천으로 편입되며 인천은 인천광역시로 공식출범됐다.  1995년 3월2일자  '대도약 토대마련 부푼기대' 기사에는 '인천은 지금까지 서울특별시 인천구 정도의 위상밖에 안될만큼 서울 종속성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나 광역화를 계기로 이같은 스스로의 속박을 과감히 떨쳐내야 할것이며 인천이 오히려 서울을 능가할 수 있는 개발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시민들 각자가 애향심과 자긍심을 갖고 지역사회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고 당시 정치권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도하며 인천광역시의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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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1일 김포시 승격 및 김포시 개청 기념식. 사진은 김포시청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한편, 검단면이 떨어져 나간 김포는 1998년 김포군에서 '시'로 승격했다. '서울·인천 등 대도시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군사보호구역·수도권정비계획·항공기 고도제한 등으로 발전이 늦어진 김포군도 이같은 제약을 해소하고 지역경제기반구축과 자주재원확충 등 시 승격 요건을 갖추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김포군은 북변·사우택지개발과 4만7천t 규모의 고촌정수장, 하수종말처리장, 청소년수련관, 여성회관, 48번도로확장, 한강제방도로개설, 소방서유치, 군립도서관, 천연잔디구장 등을 착실히 준비했다'

김포군 검단면이었다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이 된 지 5년 후인  2000년 3월7일자  '검단편입 5년-현안과 대책' 기사는 김포로 환원을 요구하는 검단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진 이유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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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승격 축하 홍보탑. /경인일보 아카이브

'편입 당시 인천시는 1단계로 2006년에는 인구 13만명, 2016년까지는 40만명을 포용하는 전원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주민들의 기대감을 부풀렸던 이 약속은 그러나 지금은 '장미빛 청사진'으로 그치고 있다…환경문제는 더 심각하다. 무허가영세공장 1천여곳을 포함, 1천8백곳에 달하는 공장이 밀집하면서 각종 폐수를 방출하고 있다. 수도권쓰레기매립지로 인한 악취피해는 이미 '고전적인 민원'으로 치부될 정도…교통 역시 문제다.

검단우회도로에 고가차도 및 지하차도를 설치하지 않아 교통소통효과가 떨어지고 있으며, 신공항고속도로 인터체인지의 미개설로 공항개발이익에서 배제돼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실정이다.' 김포로 다시 환원하자는 목소리는 이후 몇 년 간 이어졌다.

이후 2007년 검단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고 2017년 검단신도시가 착공을 시작해 지금의 검단이 되었다. 정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행정구역 개편이 지역발전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