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던 아이 생기며 고뇌·관계 균열
커리어 위기·위태로운 입지 '현실의 벽'
은유방식 다소 거칠어 아쉬움
커리어 위기·위태로운 입지 '현실의 벽'
은유방식 다소 거칠어 아쉬움
무미건조한 말투로 부작용을 설명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재이(한해인)가 가만히 듣고 있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글라스에 담긴 위스키를 벌컥 들이킨다. 옆에는 반쯤 비운 술병이 있다. 식도를 타고 40도의 술이 뜨겁게 내려가는 걸 카메라가 쫓는다. 순식간에 위까지 내려온 위스키. 종착지에서 만삭인 재이의 배가 화면을 압도한다.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동거 중인 두 연인이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면서 겪는 고뇌를 그렸다. 식탁에 마주 앉아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는 재이와 건우(이한주)는 평화롭게 담소를 주고받는 등 여느 신혼부부의 모습과 다름없다.
안온했던 이들의 일상은 뜻밖의 임신 소식에 무너져 내린다. 소소한 인기를 끄는 작가인 재이는 당장 집필을 꾸준히 하지 못할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출판사 편집자, '워킹맘' 교수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해보지만 배가 불러갈수록 글도 예전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민 끝에 낙태하기로 결심하고 병원에 가지만, 오히려 산모에게 위험하다는 경고를 듣고 포기한다.
재이와 동거하는 건우의 상황도 복잡하다. 태아를 지우려던 재이에게 '이기적'이라고 말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낙태를 만류하는 데 성공하지만 경제적 문제가 그의 목을 조여온다.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그는 원장에게 부여잡힌 하루살이 목숨이다. 해외 명문대 출신 신입 강사가 들어오면서 지방대를 졸업한 건우는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임신은 두 연인의 사회적 계층과 정체성을 선명하게 비춘다. 재이는 본래 역할에 충실하려 애쓰나 얼마 못가 커다란 벽을 마주한다. 커리어에 구멍이 뚫릴 위기가 코앞까지 왔지만 막을 도리가 없다.
문단에서 활약하며 한때 대학 동기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임신한 이후부터 '글 쓰는 사람'이 아닌 '애를 돌봐야 할 여자'로 인식된다.
건우도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살아보려 하나, 일이 꼬여가기 시작한다. 직장 동료가 원장에게 갑질을 당해도 먼 거리에서 지켜만 보던 그 역시 결국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학원 원장에게 복종한 대가로 돌아온 건 멸시와 차별이다. 군말 없이 묵묵히 일해도 원장에게 건우는 지방대 나온 덕에 그저 적당히 부려먹기 좋은 '부품'이었다.
재이의 배가 불러갈수록 둘의 관계는 되레 점점 헐거워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두 연인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마침내 태아가 빛을 보며 아기로 태어난 순간,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다.
사건을 이끄는 핵심 소재로 '임신'을 사용해 결말까지 긴장의 끈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 다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은유하는 방식이 다소 거칠어 해석의 깊이가 얕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