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신작… 각본 사카모토 유지·음악 사카모토 류이치
높은 형식적 완성도, 성소수자 낭만화는 한계
퀴어 소재 다뤘지만 ‘예쁘게만’… 대상화 오류
입체적 인물 사이에서 유랑하는 요리 캐릭터
교장과 미나토의 트롬본 씬… 다정한 패배주의
‘대상화의 오류’. 연출자가 성소수자 등 퀴어를 작품에서 다룰 때 흔히 나타나는 실수다. 사회에서 차별 대상이 되기 쉬운 성소수자를 마냥 불쌍한 존재로 다루거나, 이들의 사랑을 이성애보다 더 특별한 고차원으로 그리면서 낭만화하는 것이다. 의도 자체는 단순한 혐오와 거리가 멀고 오히려 ‘퀴어 프렌들리’에 가깝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부당한 차별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기만적인 창작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성소수자를 낭만화한 영화는 형식적 완성도가 충족되면, 퀴어가 아닌 비퀴어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팬덤몰이에 성공하기도 한다. 미국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출연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이 대표적이다.
현재 4주째 예술영화 부문 예매율 1위를 차지하며 관객몰이를 이어가는 영화 ‘괴물(2023)’도 형식적으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나 대상화의 오류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연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각본 사카모토 유지 등 거장들이 완벽하게 짜놓은 무대를 돌아다니는 요리(히이라기 히나타) 캐릭터는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흠이다.
요리는 예의 바르고 귀여운 어린이다. 달리 말하면 무해하고, 냉정하게 말하면 판타지적이다.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떼쓰지도 않는다. 심지어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해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요리가 괴롭힘 당하는 이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남성성에 있다.
그는 마초 기질이 없을뿐더러 남자 아이들 무리에 끼기 위해 억지로 ‘남자다움’을 추구하는 시늉조차 할 생각이 없다. 또래 남자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요리의 정체성이 퀴어라는 게 영화 속에서 은근하게 나타나지만, 딱 여기까지다.
영화는 퀴어 심볼만 차용했을 뿐 요리의 삶을 탄탄하게 구축하지는 않는다. 아들의 정체성을 교정하려는 폭력적인 요리의 아빠 이야기만 그저 잠시 등장할 뿐이다. 요리가 왜 꽃이름을 줄줄 외는지, 어째서 낙담하지 않는지 등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반면, 다른 등장인물들은 복잡한 삶을 살아간다. 교장(다나카 유코)은 손녀를 차로 쳐 죽였다는 소문에 휩싸인 동시에 아이들을 싫어해 몰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캐릭터다. 요리와 동급생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 담임인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 등도 전형적이지 않다. 때로는 이중적이기도 한 이들의 행동에는 여러 사연이 담겨 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입체적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동떨어진 요리는 어쩐지 요정 같다. 비인간스러운 요리에게 유일하게 부여된 인간적인 요소, 퀴어 정체성은 선언적이기만 하다. 요리의 정체성이 퀴어인 이유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전제에 해당하나, 요리의 행동 방식은 분명 이유와 맥락이 필요한 서사의 영역이다. 허나 이런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감독은 이유와 맥락을 보여주며 캐릭터의 행동 방식을 증명해야 할 부분에서 감정에 기대는 선택을 한다. 다수의 편견 탓에 손가락질받는 피해자이면서도 저항하지는 않는 귀여운 어린이 요리의 모습은 동정심만을 자극한다. 퀴어와 비퀴어 남성성을 대비시키는 것만으로 창작의 책임을 다했다고 손을 놓은 듯한 태도다.
‘괴물’은 퀴어 서사의 핵심 인물을 구축하는 데 있어 가닥을 잡지 못한 채 매듭만 지어놓았다. 대범하기보단 은근하고, 날카롭기보단 모호한 영화 속 풍경들은 아름답게만 다가온다. 퀴어를 소재로 다뤘음에도 다수의 공감을 얻어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반대로 요리 캐릭터가 부실해지는 점은 명확한 한계다.
명장면으로 꼽히는 교장과 미나토가 함께 트롬본을 부는 음악실 신도 기묘하다. 이들이 음악실에서 서툰 연주를 하는 동안 호리 선생은 학생을 때렸다는 등의 누명을 뒤집어써 학교에서 자살 시도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나토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교장에게 에둘러 말해준다.
퀴어로서 살아갈 불안한 미래를 고민하는 미나토에게 교장이 들려주는 ‘행복지론’은 기만의 절정을 한 번 더 아름답게 포장해 보여준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그럼 현실에 존재하는 소수자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사투하고 있다는 말인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예쁜 수사이자, 그야말로 다정한 패배주의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퀴어 담론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환기하려 할 경우 퀴어 문제만이 가진 특수성을 무시하게 되는 오류는 대상화의 맹점이다. 같은 층위에서 다룰 수 없는 문제를 간편하게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아무리 퀴어 프렌들리한 창작자일지라도 놓치기 쉽다.
그렇다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질문, 대체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는 그 답을 쉽게 알려준다. ‘편견에 둘러싸인 세상 속 다름을 틀림으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교정하려는 우리들’. 보편타당한 말이나, 여기서 창작자는 ‘우리들’에서 교묘하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