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면서 계속([2024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이준아 '하찮은 진심' ①)

나같은 사람이 보이는 친절한 태도는 그냥 악함의 상징 같은 겁니다… 잘못되었습니까?
감사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우부장은 이천에 소재한 식품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녀는 '김용문이 미쳤나 봐'를 외치며 점심을 먹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특식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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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우하늘 부장의 녹취록 中>

친절함과 다정함의 힘을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보이는 친절한 태도는 그냥 약함의 상징 같은 겁니다. 잘 보이고 잘 들리기 위해서는요, 더 날을 세워서 똑바로 꽂아야 합니다. 그게 잘못되었습니까?

그 날의 외근을 끝으로 밀키트 출시가 마무리되어 우부장과의 단출한 외출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긴 시간 우부장이랑 붙어 다니느라 욕봤다며 앞다투어 나의 공을 치하해주었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께름칙한 마지막 장면으로 속이 후련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성대모사를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어, 음, 저기 김이현씨는 그게 밥 한 공기 칼로리인 거는 알고 먹는 건가? 밥을 다 먹고 그걸 먹는다는 게 좀 그렇지 않나?' 김이현에게 아부성 바닐라 라떼를 건네며 짤막한 꽁트를 선보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전처럼 반응이 크지 않아 민망한 뒤끝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김이사의 호출이 있었다. 처음으로 대면한 자리에선 시장에서 밀키트 반응이 나쁘지 않다며 최전선에서 일을 진행한 장본인이니 혹시 더 보태고 싶은 의견이 있는지 물어왔다. 최전선에서 일을 진행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부장이라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자리에 우부장은 불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도 부담도 그저 내 몫이었다.

정해진 업무를 따라가기에도 급급했던 주제에 의견이랄게 있을 리 만무했던 나는 이 기회에 SNS 홍보를 더 적극적으로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뻔하디뻔한 답을 내놓았다.

"음, 좋은 생각이네. 그래 이렇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회사에 미래가 있어요. 그래, 우부장이랑 일해보니 어떻던가? 그 사람이 뭐랄까, 노멀하진 않잖아? 같이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땠어요? "

별 시답잖은 아이디어에 호평을 받은 것도 얼떨떨한 데다, 직속 상사에 대한 평가를, 그것도 임원에게서 대면으로 요구받는 상황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뇌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데 김이사가 별안간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내가 뭐 이간질을 하라는 게 아니고, 들리는 이야기들이 좀 있어서 확인해보려는 것뿐이니까. 계속 같이 다녀봤으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거래처에서는 뭐 특별히 문제 같은 거 없었어요?"

문제라, 그 문제가 단순히 기능적인 것을 칭하진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우부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페왕' (페이퍼의 왕, 서류와 절차에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뜻이다) 이라 불릴 정도로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별명에 깃든 것은 경외보다는 팔 할이 조롱이었다. 맡은 일에는 오차가 없었지만, 그 일 처리라는 것이 조직을 매끄럽게 굴리기 위함이라기보단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어떤 강박적인 거부감 같은 것에 기인한 것이라 오히려 상대방을 겸연쩍게 만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직원들이 궁금해해서 그러는데 다 같이 먹어보게 추가 샘플 좀 더 주실 수 없냐는 갑의 애교 섞인 요청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해진 견본은 여기까지라서요, 제품 평가하기엔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로 말을 끊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할 때만 발휘되는 그 고도의 집중력은 상대방에게서 풍겨오는 당혹감, 어색해진 공기 따위를 파악하는 데에는 간데없이 사라져 숨이 막히는 건 늘 내 쪽이었다.

그런 문제를 말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생각나는 일화만 해도 한 보따리인데, 근데 또 고작 그런 문제가 '문젯거리'가 되는 걸까, 생각이 폭주했다. 하지만 이후에 김이사가 제기한 문제라는 게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꼬리를 잇던 상념 덩어리들은 도화선을 잃은 폭탄처럼 머리 한구석을 차지한 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우부장이…… 아, 나 이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여직원들 사진을 자꾸 찍는다는 말이 나와서 그래. 그거에 대해선 뭐 아는 거 없어요? 김용문 사원이 친한 여직원들이 많다던데. 외근 나가서도 뭐, 여자들 몰래 찍고 그런 일 없었어요? 괜찮아요. 오늘 나온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테니까."

사람이 좀 찌질하긴 해도 이렇게 끝도 없이 추잡하진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혼란함이 나를 덮쳐왔다. 김이사는 내 표정에서 어떤 신호를 읽었는지 조용히 누군가를 호출했다. 어느샌가 사내 분위기와 겉도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있었다. 김이사는 '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대답해요. 들리는 말로는 우하늘 부장이 김용문 사원의 외모나 학벌에 대해 공격적인 발언을 했다는데 맞나요?' 따위에 반박하기 힘든 질문들을 몇 개 던졌다.

"그게, 그런 말을 하시긴 했는데 공격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했다는 말이죠?"

"네 뭐, 하시긴 했죠. 그렇긴 한데……."

김이사의 연이은 강속구에 좀처럼 맥을 못 추고 있을 때 회심의 질문이 던져졌다.

"몰래 여자들을 촬영한다거나 성추행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고요?"

김이사의 말투에서는 갈급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하게 힘을 주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김이사의 결정적인 문제 제기에 힘을 실어주지도, 그렇다고 우부장을 제대로 대변해주지도 못한 채 찜찜하게 그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인재 운운하며 나를 환대하던 김이사의 태도는 인터뷰가 마무리되자 눈에 띄게 성의가 없어졌지만 내 미련한 머리는 예기치 않게 쏟아진 질문세례와 관련된 기억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홍대리는 카톡 창을 컴퓨터 화면에 버젓이 띄워놓고는 누군가와 이모티콘을 잔뜩 섞어 정신 산란한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빠른 속도로 타이핑 하는 그녀의 가벼운 손가락을 보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느릿느릿 스마트폰의 액정을 터치하던 우부장의 뭉뚝한 검지가 연상되었다.

그리고는 퍼뜩 떠올랐다. 외근을 나간 날이면 주기적으로 시간이 뜬 배경화면을 캡처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이해할 수도 없었고 딱히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었던 그의 기이한 행동이 말이다.
 

<우하늘 부장의 녹취록 中>

나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야말로 나를 업신여기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을 설명했는데도 자꾸 다른 답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긴다는 뜻입니까.

김이사에게 강력히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김이현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회사 전체로 퍼졌고, 추잡할수록 달콤한 법인 모처럼의 사내 스캔들에 사람들은 애써 호기심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 우부장만이 외딴 섬처럼 자신의 일과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주는 술도 한 잔 안 받는 양반이 사진에는 또 조예가 깊으셨나 보지', 소문의 진위를 파악도 하기 전에 홍대리는 우부장이 멀찌감치 지나가기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다리 위에 무릎담요를 가져왔다.

"근데 증거가 나왔어요? 사진이라던가…."

"그게 남아있겠어? 다 지웠겠지. 어쩐지 심심하면 찰칵찰칵 거리더라니, 그게 설마 진짜로 다리를 찍는 건 줄은 상상도 못했지. 그렇게 대놓고."

그러니까 그렇게 대.놓.고 사진을 찍는 걸 누가 봤냐고, 정확히 피사체를 확인한 게 맞냐고, 나는 자칫 따져 물을 뻔했지만, 확신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자 저절로 말이 꼴깍 넘어갔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우부장에게 언어 성희롱을 당한 여직원들이 알게 모르게 많다며, 드디어 터질 일이 터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누가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는 말해주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김용문씨도 이 기회에 인사팀에 신고해. 그동안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다 참아줬잖아."

누군가는 짠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우부장을 둘러싼 폭풍전야 같은 현재 상황에서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단박에 가늠할 수 있었다. 끈 떨어진 우부장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온갖 구박은 다 받고 클레임 처리까지 도맡아 해야 했던, 좋게 말해 성격이 동글동글한 거지 정곡을 찌르자면 살짝 '모자란' 캐릭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열심히 우부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내 치부를 드러냈을 때, 웃겨 죽겠다면서 깔깔거리던 그들의 마음속에선 '아이고 저 모지리, 좋댄다' 하고 있었던 거다. 적어도 같이 싸잡혀 한편으로 몰리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다가도 어쩔 수 없이 뒷맛이 씁쓸했다. 나를 대하는 김이현의 태도조차도 미묘하게 사무적으로 변해있었다.

그 전까지는 우부장의 은근한 고립이 모종의 자유를 향한 고집처럼 느껴졌다면, 모두가 수군거리는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소외감과 무지함이 그에게 덕지덕지 들러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한번 자리를 잡자 어쩌다 그와 마주쳐도 전처럼 자연스러운 대응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보잘것없는 직장 내 동선과 그의 동선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는 탕비실, 점심 후 한두 시간 후 화장실로 이어지는 내 생체리듬을 그 역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동선이 겹친다고는 해도 원체 동석을 꺼리는 성향이신지라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전 같았으면 자연스러웠을 안부 인사조차도 얼굴 근육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어느 날, 홍대리는 늘 그렇듯 지나가는 말로 '우리 점심 요 앞에 새로 생긴 파스타 집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라고 물었고, 나는 입사 이래 처음으로 '네 저도 파스타 먹고 싶어요'라고 대답을 했고, 홍대리는 예상치 못한 나와의 합석에 잠시 당황을 했고, 그렇게 쥐꼬리만 한 밀가루면 주제에 한 그릇에 만 칠천 원에 육박하는 로제 뭐시기 파스타를 홍대리와 김이현을 포함한 네 명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먹게 되고 만 것이었다.

메뉴를 고르고 각자의 컵에 물을 따르고 주문을 하는 동안에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파스타를 먹고 싶다니 의외였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부터 주말에는 주로 뭘 하는지, 더 나아가서는 여자친구가 있는지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김이현 쪽으로 시선이 향했는데 너무나도 순수하게 나 몰라라 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마저도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을 뿐이고) 하는 내 신변잡기에 대한 다정한 질문들이 오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답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나는 파스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주말에는 그저 게임이나 할 뿐이고, 여자친구는 있을 리가 없으니 답변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었다.

피차 어색한 시간을 뚫고 마침내 메뉴가 모두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는 왜 모든 주문을 한 사람이 도맡아 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샐러드, 피자, 파스타 두 종류를 가운데 놓고 사이좋게 나눠 먹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홀로 내 앞에 놓인 그 꾸덕한 면 덩어리를 해치울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할당된 관심은 일찌감치 모두 소진된 듯 어느 순간부터 내 존재는 거의 조형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다양한 주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홍대리 옆자리에 앉은 자의 숙명으로 한 번씩은 다 귀동냥으로 들어봤음 직한 얘기들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주제가 우부장으로 옮겨붙자 더는 시큰둥할 수가 없었다.

"오늘이지 우부장 감사팀에서 면담 있다는 날이?"

"아니 그런데 우리 회사에도 감사팀이 있었어요?"

"목격자까지 나온 마당에 그냥 넘어갈 순 없었겠지. 김이사가 감사팀 비슷하게 TF팀을 만들었대. 이 기회에 사내 이슈들 뿌리 뽑는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부장 대단하네, 없던 감사팀도 만들고. 그나저나 이현 씨는 괜찮아? 목격자가 본 사진이 이현 씨 뒷모습이라며? 와 진짜 기분 더러웠겠다."

김이현이 그렇죠 뭐, 짧은 대답을 끝으로 빙그레 웃었다. 김이현이 짓는 웃음의 종류를 -자랑은 아니지만- 줄줄이 꿰고 있는 나에게도 그 미소는 생소했다. 그리고 그 미소만큼이나 낯설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일렁이던 멀미 같은 불편한 감정이었다.
 

<우하늘 부장의 녹취록 中>

그것은 그저 내 개인의 실수였지 누군가를 해할만한 행동은 아닙니다. 제3자가 말을 이상하게 퍼뜨리기 전까지는 피해자가 피해자도 아니었어요.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나입니다.

오합지졸로 구성된 TF팀은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와해 되었고, 우부장의 녹취록은 허술한 보안으로 암암리에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돌고 돌았다. 그 안에는 물증 없이 빈약한 목격담이 전부인 '몰카' 사건에 대한 짤막한 추궁과 그간 우부장이 보인 투박한 언사에 대한 꾸지람이 이어졌는데, 감사팀장을 맡은 김이사의 수족 중 한 명이 작정하고 우부장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모아온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김용문 사원에 대한 습관적인 인신공격'도 한 문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증언이란 것들이 막상 서면으로 옮겨 놓으니 어떤 결정적인 선을 넘는 것이 없었을뿐더러, 그동안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불행이 면면한 우부장의 인생사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겪은 조실부모, 그 이후로 심각한 불안증을 앓게 된 여동생, 그런 여동생에게 정해진 시간마다 시계 화면을 캡처해 생사를 알려왔다는 진상은 여론 일부분을 동정표로 돌리기에도 충분했다. 조직에 남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절규에 가까운 변을 내어놓는 우부장의 태도에 녹취록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감사팀장의 낭패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감사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우부장은 이천에 소재한 식품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마지막 본사 출근을 앞두고는 그답지 않게 연차를 썼고, 다음 날 출근해 보니 그의 자리는 주인의 흔적 없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이별인가 싶었는데 공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김용문 사원, 일이 많이 바쁘지 않으면 다음 주에 한 사흘 정도 여기 와서 내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본사에는 내가 직접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하나.

-사흘은 4일이 아니고 3일을 뜻합니다. 저번처럼 헷갈릴까 봐 덧붙입니다.-

그렇게 공장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그와의 협업에 들어갔다. 그는 명색이 '페왕' 답게 시스템 없이 마구잡이로 관리되던 온갖 실물 서류들을 분류해 데이터화 시키는 작업에 돌입한듯했다. 본사에서 떨어진 여러모로 불쾌한 사내가 벌이는 추가업무를 현장직에서 반길 리가 없었다. 우부장은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본사에서 잠시 빼 온들 큰 타격이 없을 나를 고른 것이다.

그의 부름을 받고 꼬박 이틀을 먼지 쌓인 서류 뭉텅이들과 함께 쿰쿰한 냄새가 나는 사무실 안에서 노트북 타이핑 소리만으로 지새우고 있자니 조금 억울해졌다.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부장님, 저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술도 좋구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빠르고 명쾌하게 돌아왔다.

"그래야죠. 당연한 얘깁니다."

퇴근 후 말없이 나를 차에 태운 그는 근방에서 유명한 오리 주물럭집 앞에 잠시 정차하더니 미리 주문해 놓은 듯한 음식을 한 아름 포장해서 들고 왔다. '여기서는 술을 마시면 택시도 없고 대리도 부르기 어려우니 내 방에 가서 마십시다.' 나는 저녁 한 끼 얻어먹자고 들었다가 그의 사적인 공간까지 진출하게 된 형국에 목이 바짝 탔다. 그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어차피 내일이면 이곳에서의 일정이 끝나니 숙소에서 짐을 챙겨 오겠냐고 물었다.

"네? 그럼 부장님네서 자고 가라구요?"

아뿔싸 지나치게 크게 놀라는 목소리였나, 싶어 그를 쳐다보는데 나보다 그가 더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이래서 내가 이 회사의 빌런이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악당이라니, 좀 너무하다 싶었는데 김용문 사원 입장에서는 내가 악당이 맞겠네요."

차 안의 공기는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물어도 좋을 때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저한테 자꾸 그런 말들을 하셨어요? 솔직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거든요."

그는 잠시 내 질문을 곱씹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하암, 곧이어 익숙한 낮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음, 친구가 자꾸 멋있는 옷인 줄 알고 너무 우스꽝스러운 짝퉁을 입고 다닌다고 칩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기분 나쁠까 봐 말을 안 해줘요. 뒤에서 조롱을 당하든 말든 하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나는 말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창피는 나한테만 당하면 되지 그 이후가 좋아지잖아요."

그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김용문 사원의 진술 中>

평소에 충고를 조금 과감하게 하시는 편이긴 하죠. 그게 인신공격처럼 느껴진 적이 있냐는 말씀이시죠? 그게, 물론 기분이 좋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뭐 대단히 우울해지고 이런 것도 아니라서…. 네? 아 정확히 네, 아니오로 말하라고요. 네, 아, 아니요. 저는 솔직히 지낼만했습니다만.

우부장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빌런이 등장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우부장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 지나치게 많았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고, 지나치게 꼰대가 되기를 꺼린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요즘은 라떼라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내가 이래 봬도 낄끼빠빠를 잘해요."

그가 어디서 주워들은 때 지난 줄임말 같은 걸 입에 올릴 때마다 모두가 극도로 민망해 했지만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도 그런 분위기는 또 용케 감지를 못하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운 사냥감을 문 홍대리는 누가 보면 그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같이 그의 웃기지도 않은 말들을 나에게 속닥거리며 전해주었다.

"너무 웃기지 않아? 용문씨는 아직 김팀장님이랑 말 안 해봤어?"

"네, 아직이요."

"어디 요즘 애들 쓰는 은어 사전 같은 거 넣어뒀나 봐. 매일매일이 새로워. 배운 거 써먹고 싶어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니까?"

"아, 그래요?"

그녀는 부쩍 심드렁해진 내 태도에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한결 서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용문 씨, 요즘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하는데 쳐다를 안보지?"

직장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식은땀으로 등어리를 잔뜩 적실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릿속이 시원하게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하암, 기합 한 번.

"음, 그럴리가요 선배, 그냥 좀 시끄럽달까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잠시 후 점심시간이면 그녀는 친애하는 동료들과 함께 '김용문이 드디어 미쳤나 봐'를 외치며 파스타인지 떡볶이인지를 먹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구내식당 특식은 뭘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