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즈’ ‘관능의 법칙’ 영화감독 권칠인

강화도에서 일찍이 기독교 세례 받은 의사 집안

큰아버지, 병원 부족 강화도에 ‘구세의원’ 개원

송림동 산8번지서 인천교대 부속초 통학 추억

1970년대 인천 무수한 극장 경험 ‘시네마 키드’

한국영화아카데미 거쳐 충무로 현장 뛰어들고

2003년 ‘싱글즈’로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끌어

인천은 영화의 도시, ‘대한민국 변두리’ 상징해

다음 작품 동인천 ‘삼치거리 사람들’ 다루고파

권칠인
지난 3일 오후 인천 중구 중앙동2가 인천영상위원회 건물 앞에서 만난 권칠인 영화감독. 인천영상위원회 사무실 이전 계획이 있는데, 권 감독은 근대건축물인 현 사무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며 인터뷰 장소로 인천영상위원회를 택했다. 2024.01.0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영화의 도시’는 서울 충무로일까, 부산국제영화제의 부산일까. ‘인천 시네마 키드’ 권칠인의 답은 단연 인천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에게 고향 인천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화적인 도시다.

영화감독 권칠인은 ‘서울민국’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에 붙어 있으면서도 가장 변두리성이 짙은 인천의 정서가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권칠인 감독의 시선에는 어린 시절 경험과 중견 영화감독이 된 후 고향 인천에서 역할을 맡은 시기 경험이 녹아 있다.

권 감독의 친가와 외가 모두 강화도에서 뿌리내린 집안이다. 많은 강화 주민이 그랬듯 기독교(감리교)를 빨리 받아들인 집안이기도 했다. 증조모는 ‘전도부인’이라 불린 초기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한 교인이었다. 증조모는 전국에서도 규모가 컸던 1919년 3월18일 강화읍 만세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권 감독 조부는 목사 안수를 받아 강화에서 개척교회를 일궜다.

감리교 집안의 영향으로 부친과 그 형제들은 배제학당,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를 졸업했다. 먼저 의사가 된 권 감독의 큰아버지 권요한은 1932년 10월 강화읍 신문리에 ‘구세의원’이란 병원을 개업했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5일자 신문에는 강화군 내 의료기관이 불충분하고 의사가 없어 늘 유감이었다면서 “금반 세의전(세브란스의전)을 마친 의학사 권요한 씨가 구세의원을 개설해 개설 기념으로 지난 18일부터 2주 동안 무료 진찰과 실비 제공을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권칠인
‘매일신보’ 1932년 10월25일자에 실린 강화군 구세의원 개업 기사.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강화읍 구세의원은 지역 응급의료기관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7월13일자 신문을 보면, 그해 7월10일 새벽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동화금광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광부 5명이 중상을 당했다. 부상자들은 구출된 즉시 구세의원으로 후송돼 권요한의 응급치료를 받았다고 해당 기사는 전했다. ‘동아일보’ 1936년 7월24일자 신문에는 강화도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구세의원이 조사해 감염자와 증상 등을 파악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저희 아버지는 의사가 된 후 큰아버지의 구세의원에서 일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강화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 밑에 ‘평화의원’을 개업해 독립했어요. 집도 그쪽으로 이사했습니다. 워낙 시골에 병원을 차린 건데, 아버지가 민중 속으로 파고들자는 나로드니키(Narodniki·인민주의) 사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신편 강화사 증보’(2015)를 보면 1980년까지 강화군 내 의료기관은 10곳 내외의 의원, 치과 2~3곳, 한의원 5~7곳뿐이었다. 1981년 12월 연세대의료원 지원으로 강화병원이 설립됐다. 의사로서 권 감독 아버지와 형제들이 강화 지역에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권 감독의 강화 시절 기억은 비교적 풍족했다. 그가 49칸짜리 전셋집으로 기억하는 온수리 집은 장작불을 때는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권칠인
인천교대 부설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운동회에서 권칠인(왼쪽 2번째) 감독. /권칠인 감독 제공

권 감독 가족은 1965년 인천 동구 송림동 활터고개 쪽으로 이사왔는데, 그의 큰형이 당시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뒷바라지하기 위한 이유가 컸다. 아버지는 서림국민학교(현 서림초) 인근에 ‘서림의원’을 개업했다. 동구가 2017년 발간한 도시생활사 조사보고서 ‘송림동’을 보면, 활터고개와 부처산(또는 부채산) 인근인 이 지역은 중구를 중심으로 한 인천 원도심의 외곽으로 원래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과 1960~1970년대 노동자 유입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고지대 마을은 전형적인 판자촌이었다.

“송림동 (산)8번지는 옛날부터 대표적인 달동네, 깡패동네로 유명했거든요. 아버지가 거기에서 병원을 개업한 것도 나로드니키 같은 의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집에 돈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요. 근처 인천교 밑에서 게를 잡거나 부채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놀았죠. 그때 부채산에 문둥이촌(한센병 환자 주거지)도 있고 그랬어요. 염전이 많아서 염전에 물 대는 저수지에서 수영도 많이 했고요. 한두 명씩 물에 빠져 죽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조혁신 소설집 ‘뒤집기 한판’(2023년 개정판·미디어밥)에 수록된 단편 ‘부처산 똥8번지’에선 송림동에 40년 살았다는 이씨 아저씨가 낮술을 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송림동 8번지 유래를 이렇게 늘어놓는다. “네 아부지가 처음 부처산에 들어왔을 땐 사실 이곳은 딱히 땅임자가 없었거덩. 솥단지 걸고 흙바닥에 이부자리 먼저 깐 놈이 임자였지. 근데 그래두 먼저 자릴 틀고 앉은 사람에게 텃새란 게 있었어. 동네 건달들이 벽돌장을 올리고 판자에 못질하는 네 아부지한테 텃새를 놓았어.” (‘부처산 똥8번지’ 중에서)

권 감독의 둘째 형과 누나는 서림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권 감독은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에 입학했다.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지금의 미추홀구청 자리다.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경인교대를 따라서 2006년 계양구 효성동으로 이전했으나, 1969년 지은 학교 건물은 그대로 남아 구청사로 쓰이고 있다.

“성인이 되고 언젠가 제가 다녔던 4학년 3반 교실을 찾았는데, (미추홀구) 문화예술과 사무실이더라고요. 서림국민학교는 워낙 학생이 많아서 3부제로 수업했을 정도였어요.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추첨해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추첨을 안 하려면 부설유치원을 다녀야 했어요. 유치원 입학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죠.”

권칠인
인천교대 부설유치원의 유치원복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권칠인 감독 제공

송림동에서 동네 단짝 3명과 1시간 걸려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로 통학했다. 부채산 쪽은 돌아가는 길인데도 그 길이 재미있어서 귀갓길은 부채산을 택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옛 선인학원이 도화동 일대 ‘아시아 최대’라는 대규모 학교 단지와 체육관을 건설하는 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현역 육군 장성 백인엽이 1958년 성광학원을 인수하고, 1965년 선인학원을 설립해 1979년 인천공과대학이 들어서기까지 이 일대 초·중·고교와 대학 14곳이 난립했다. 권 감독은 “참 대단한 난개발이었다”며 “지금도 어마어마한 그때 학교 건설 풍경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이 ‘시네마 키드 권칠인’의 본격적 시작이다. 권 감독은 송림동 현대극장부터 미림극장, 문화극장, 도원극장, 오성극장, 애관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 인천의 극장이란 극장은 모조리 다녔다. 1985년 영화법(현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될 때까지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20개 영화사가 한국영화 제작을 독점하던 시대였다. 외화도 한 해 20편밖에 수입하지 못했다. 권 감독은 중·고등학교 때 한 달에 10편씩은 극장에서 영화를 봤으니, 당시 수입된 거의 모든 외화와 한국영화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경우에 따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대괴수 용가리’ 같은 영화가 기억이 나고요. 인형극을 영화로 만들어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개봉관, 재개봉관, 삼봉관 등 지금과는 영화 관람 문화가 많이 달랐죠. 인천에 극장이 기형적으로 많았던 시대에 성장기를 보냈다는 게 저한텐 큰 세례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쉽게 체험하면서 타인이나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저에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인천에 극장이 얼마나 많았을까. 영화진흥위원회가 간행한 ‘한국영화자료편람’을 보면, 1976년 10월말 기준 경기도 시절 인천시 소재 극장은 애관·동방·인천·자유·오성·미림·문화·현대·도원·장안·한일·부평·금성·백마·대한 등 15곳이다. 이 가운데 8곳이 중구·동구에 있었다. 나머지 극장은 남구(현 미추홀구) 3곳, 북구(현 부평구) 4곳이었다. 강화군에도 강화극장이 있었다.

극장이 106곳에 달한 서울에 비할 순 없었지만, 당시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시에는 극장이 4곳뿐이었다. 인천엔 신작을 상영하는 개봉관이 6곳이나 있었는데, 수원은 개봉관이 한 곳도 없고 모두 재개봉관이었다. 경기도 주민이 최신 영화를 보려면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야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경동 애관극장이 극장주가 대를 이어가며 운영하고 있고, 동인천역 북광장 방향 미림극장, 부평역 대한극장이 간신히 옛 극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형들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권 감독은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형들은 의대 진학을 택했으나, 권 감독은 1980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형들을 따라서 의사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권 감독이 건축학도가 되고자 했던 건 실은 문학가나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였다.

“고등학생 때 시인 이상(1910~1937)에게 매료돼 그에 관한 모든 책을 섭렵했습니다. 이상이 건축학도예요. 이장호 영화감독님도 건축학과라는 얘기를 들었고, 러시아의 전설적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도 건축학도였죠. 대학을 진학할 때 부모님께 차마 연극영화과를 가겠다는 얘기를 못할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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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친구들과 등산한 날 찍은 사진. 대학 시절 권 감독(사진 가운데)은 학업보단 학교 방송국 PD, 민요회 활동 등을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권칠인 감독 제공

권 감독은 대학교에서 학교 라디오방송 PD로 활동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했다기 보단 방송국을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낫겠다”고 했다. 행위예술가 무세중과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지봐라 돈놔라’ 등 공연 활동, 신경림 시인이 지도한 ‘민요연구회’ 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80학번답게 당대 부조리에 대한 분노 그리고 변혁의 열망이 컸다.

권 감독은 1985년 한국영화진흥공사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2기로 입학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김정진, 노효정, 배경윤, 박재호 등 영화인들이 동기다. 당시 연극영화학과가 있는 대학은 동국대, 중앙대, 한양대, 서울예대 4곳뿐이라 현장에서 국비를 투입해 설립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고 한다. 물론 경계하는 눈초리도 있긴 했다.

“카메라 등 기자재도 별로 없고, 필름도 워낙 비싸 영화를 찍는다는 행위가 일상일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선 필름을 꽤 쓸 수 있었어요. 그때 막 도입되던 16㎜ 동시녹음 카메라와 스틴벡(Steenbeck) 편집기를 경험하는 등 혜택이 많았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별들의 고향’(1974), ‘바보들의 행진’(1975)을 제작한 유명 영화사 화천공사 기획실에 입사했습니다.”

권 감독은 화천공사 입사 6개월 만에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연출부와 조감독 생활이 10년간 이어졌다. 그는 박철수(1948~2013) 감독의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안개기둥’(1987), ‘접시꽃 당신’(1988), 김호선 감독의 ‘사의 찬미’(1991) 등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특히 박철수 감독의 ‘안개기둥’은 여성 불평등이란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로, 권칠인 감독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권 감독도 “‘안개기둥’ 조감독 때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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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입학식 사진. 사진 앞 줄 맨 오른쪽이 권칠인 감독이다. /권칠인 감독 제공

데뷔작 ‘사랑하기 좋은 날’(1995)은 처음 시나리오 제목이 ‘서른 살 되기’였다고 한다. 권 감독은 그때 ‘서른 살 되기’를 제목으로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성장 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데뷔작이 “망해도 엄청 망했다”고 했다. 자신에게 영화의 힘을 느끼게 했던 하종길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을 힘든 시기에 다시 보면서 기운을 냈다고 한다.

두 번째 영화 ‘싱글즈’(2003)가 흥행에 크게 성공해 다시 일어섰다. 여성 주인공들을 전면에 내세운 ‘싱글즈’는 당시 파격이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인천영상위원회가 2022년 펴낸 ‘10인의 인천 영화인’에서 “여성운동에 새바람이 불었던 2000년대를 기점으로 영화판은 본격적으로 젠더 이슈를 가시화하기 시작했다”며 “영화를 통해 여성의 성과 해방, 젠더를 둘러싼 숱한 담론들이 표출됐고, 그 중심에 권칠인의 영화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첫 작품이 유작이 되는 감독이 정말 많아요. 저는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 사이 간격이 8년 정도 됩니다. 망한 감독이 연출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요. 유명한 배우 섭외는 제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고, 여배우 가운데 연기가 훌륭한 배우가 많은데, 그들이 업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그들만의 이야기도 없었고요. 톱 여배우 한두 명과 같이할 이야기를 기획하자고 해서 시작한 영화가 ‘싱글즈’입니다.”

‘싱글즈’가 탄생한 2003년은 ‘한국영화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박찬욱의 ‘올드보이’,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가 ‘싱글즈’와 함께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 무렵 권칠인 감독은 영화계와 영화인 권익 찾기 운동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을 규정하는 ‘스크린 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2004년 영화감독조합을 창립해 박찬욱, 류승완 감독과 함께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14년 ‘관능의 법칙’을 연출할 때는 영화계 최초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이행했다.

“1980년대 중후반 20개 메이저 영화사 체제가 무너지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게 영화산업 자본입니다. 누구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비디오 자본이 들어왔고, 이어 창업투자사 자본이 들어왔고 그 다음에 대기업이 들어왔다가 물갈이되면서 현재 CJ, 롯데 등으로 굳어집니다. 망한 감독일 때는 이 과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는데, ‘싱글즈’가 잘 된 다음에는 책무감이 들었어요. 불합리하고 부당한 관행을 깨고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일들을 많이 했죠. 그중 하나가 근로계약이었고요. 저작권 침해 문제 개선은 여전히 요원하네요.”

권칠인
2014년 1월28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권칠인 감독의 영화 ‘관능의 법칙’ 언론시사회. 사진 왼쪽부터 영화 주연을 맡은 배우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 권칠인 감독. /경인일보DB

고향에서도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2011년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2013년 2월 인천문화재단 산하에서 독립한 사단법인 인천영상위원회 설립을 이끌었다. 2016년까지 인천영상위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영상산업 성장에 이바지했다. 그가 인천영상위에 있을 때 인천 대표 영화제가 된 ‘디아스포라영화제’(2013년)를 처음 개최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인천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인천 좋잖아요. 오랜만에 와서 보니 정감 있었고요. 지금도 중구 신포동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인천영상위는 중앙정부가 하지 못한 빈칸을 지방정부의 힘을 빌려 채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씨뿌리기 작업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디아스포라영화제도 문화체육관광부 무지개다리 사업(문화다양성 사업)으로 훌륭한 기획자가 예산을 받아 처음엔 소규모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인천의 색깔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표 브랜드가 됐고요. 인천독립영화협회를 중심으로 지역 영화라는 개념이 움트고 있기도 합니다.”

권 감독이 볼 때 인천은 영화를 촬영하기 매우 좋은 장소다. 개항장부터 송도국제도시까지 100년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지역이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바다, 국제공항, 구도심, 신도시 등을 고루 가진 인천은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선 인천을 제대로 다루고 있을까.

“영화계에서 인천은 산업적 니즈(needs)가 있지만, 인천의 이미지를 잘 봤느냐 한다면 그건 아닙니다. ‘마계 인천’으로 그려지죠. 인천에는 아직 ‘국제시장’(2014) 같은 영화가 없잖아요. ‘인천상륙작전’(2016) 정도가 있는데, 그 영화에 인천의 모습이 담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인천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자적인 인천의 정서라는 게 굉장히 복합적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 같은 경우가 정확하게 인천을 집어냈어요.”

권 감독은 인천영상위 운영위원장을 지낼 때부터 영화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정서가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이 대한민국의 가장 변두리라고 본다. 단순히 서울 변두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근본적인 변두리라고 했다. 서울로 향해 가다가 잠시 머물렀거나 서울을 떠났으나 차마 고향까지 가지 못한 자들의 도시, 황해도·충청도·전라도·토박이들이 합쳐진 도시, 이별의 인천공항 등이 권 감독의 인천이다.

권칠인
지난 3일 인천 중구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인터뷰 중인 권칠인 감독. 그는 동인천 삼치거리 사람들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2024.01.0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권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연출하고 싶어 10년째 끙끙거리고 있는 소재는 동인천 ‘삼치거리 사람들’이다. 최희영 작가가 2014년 쓴 동명의 르포르타주가 모티브다. 권 감독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갔던 술집이 동인천에서 삼치를 파는 선술집이었는데, 지금의 삼치거리 ‘인하의집’이다. 그가 처음 찾았을 땐 간판이 없는 삼치구이집(인하의집) 한 곳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찾았을 땐 삼치거리가 돼 있었다.

‘삼치거리 사람들’을 보면, 1968년 허름한 선술집으로 연 인하의집은 가난한 예술인들과 대학생, 특히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단골이었다. 인근 대화주조(현 인천탁주)에서 막걸리(현 소성주)를 받아 팔았다. 이 가게가 인하의집 간판을 단 건 1986년이다. 단골 인하대 학생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가게 이름이라고 한다.

1990년대 초까지 거리엔 인하의집, 인천집, 본전삼치 등 삼치구이집 3곳뿐이었다. 인하의집이 성공했다는 소문으로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삼치거리가 형성됐다. 동인천 삼치거리는 어느 집에도 간판에 ‘원조’라는 말을 쓰지 않고, 원조 다툼을 벌이지 않고, 호객 행위나 바가지 요금이 없는 점이 독특하다. 책에선 ‘삼치 공동체’라 표현했다. 한때 20여곳에 달하던 동인천 삼치구이집은 현재 10여곳이 영업하고 있다.

“인하의집 1대 사장님은 이 거리에서 삼치구이집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게를 내도록 도와줬다고 합니다. 인하의집을 중심으로 삼치구이집끼리 삼치 손질하는 것을 돕고, 술을 대주고, 손님이 많으면 다른 집을 소개해 줬다고 해요. 상인들이 모여 1년에 한두 번 야유회도 가고, 수익을 거둬 장학금을 기부하고요. 그 엄혹한 경제 환경에서 그렇게 공동체로 같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대단합니다.”

권 감독은 앞으로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삼치거리 사람들’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인천의 정서이자 꼭 만들고 싶은 영화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권칠인 감독 영화 가운데 인천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아직 없다. 다음 영화는 인천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약력

1961년 강화군 강화읍 출생

1974년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 졸업

1977년 동인천중 졸업

1980년 부평고 졸업

1985년 한양대 건축공학과 졸업

1986년 한국영화아카데미(영화연출) 수료

1986년 화천공사 기획부장

2004~2005년, 2009~2012년 영화감독조합 대표

2008~2011년 영상물등급위원회 등급위원

2010~2013년 동아방송예술대학 겸임교수

2010~2014년 인천문화재단 이사

2012~2013 한국영화아카데미 3D제작교육센터 책임강사

2011~2016년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필모그래피

‘사랑하기 좋은 날’(1995), ‘싱글즈’(2003), 디지털 옴니버스 ‘이공’(2005·공동 연출), ‘뜨거운 것이 좋아’(2008), ‘참을 수 없는’(2010), ‘원더풀 라디오’(2012), ‘관능의 법칙’(2014), 3D 옴니버스 ‘방안의 코끼리’(2016·공동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