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도 갉아먹는 아픔… 법, 마지막호소에 응답하라 


대기업부터 복지시설까지 어디서든 발생
관련법 시행 5년 되어가지만 피해는 여전
노동부 접수 2만6955건중 검찰송치 475건
'보복성 부당대우' 인정돼야 징역·벌금형
'객관적 기준' 추가 조항 등 법개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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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께선 생전 직장 내 괴롭힘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지난해 10월 4일 인천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에 힘써온 김경현 사회복지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연수구 한 장애인지원기관에 입사한 지 불과 11개월만의 일이었다.

김씨가 1년 가까이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그녀가 스마트폰에 남긴 유서가 발견되고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유서엔 해당 기관 대표이사와 부대표가 김씨의 업무 미흡을 입증한다는 명분으로 동의 없이 불법 녹취와 촬영을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통화는 5분 내로 하라고 명령하는 등 업무상 부당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김씨가 회사를 비방해 징계를 주겠다는 협박성 발언과 함께 지속적으로 퇴사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씨는 누구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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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김경현씨의 유족이 업체 진상규명 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지난달 24일엔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바)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드러났다. 노동부는 삼바 내 폭언·욕설·성희롱, 연장근로 한도 초과 등 노동관계법 위반사항을 입증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부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751명 중 417명(55.5%)이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등을 직접 당하거나 동료가 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 내 괴롭힘은 대기업부터 복지시설까지 규모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은 가해자의 문제행위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면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업무 능력이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업무와 상관없는 비난과 조롱, 다른 사람들 앞이나 온라인상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노동부는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시행했다. 당시 직장 내 괴롭힘이 연이어 발생해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시기였다. 2014년 대한항공 오너 일가가 이륙 준비 중인 비행기를 땅콩 서비스 문제로 회항시킨 사건, 2017년 한림대성신병원 간호사들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병원 장기자랑에 동원돼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강요받은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관련법이 시행된 지 5년이 되어가지만 직장 내 괴롭힘 피해는 여전하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을 돕는 민간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9월 전국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난 1년 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36%에 달했다. 괴롭힘 유형은 ▲모욕·명예훼손(22.2%) ▲부당지시(20.8%) ▲폭행·폭언(17.2%) 순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전문가들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노동부가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접수한 사건은 지난해 4월 기준 2만6천955건이다. 이 중 근로감독관의 실제 조사·수사를 통한 개선 지도, 과태료 부과 등으로 이어진 사건은 3천120건(11.6%)에 불과하다.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검찰 송치는 475건(1.8%)에 그쳤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직장 내 괴롭힘 혐의가 검찰 송치까지 이어지기 힘든 이유는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신고자에 대해 '보복성 부당대우'를 했을 때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보복성 부당대우가 인정될 경우 가해자는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을 선고받을 수 있다.

그 외에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직접적인 협박과 모욕, 폭행을 당하면 근로기준법이 아닌 형법에 따라 경찰에 고소해야만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김기홍 노무법인 돌꽃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어겨도 가해자가 받는 처벌은 과태료 부과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가해자들 입장에선 처벌 자체가 약하다 보니 두려움 없이 괴롭힘을 행하는 것"이라며 "결국 직장 내 괴롭힘을 해결하려면 일차적으로 징벌 정도를 높여야 하고, 직장 내 괴롭힘도 다른 범죄와 같이 형사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법적인 제도 정비뿐만 아니라 사회·조직문화 개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이승길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련법이 있음에도 발생 건수가 줄어들지 않는 건 사람들이 괴롭힘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의무적으로 괴롭힘 예방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도 필요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추가 조항 등 관련법 개정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혜선 가톨릭대학교 보건의료경영대학원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 안에서 이뤄지는 데다, 관련법이 있어도 불이익 등을 우려해 피해 사례가 밖으로 노출되기 힘든 구조"라며 "현재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근로기준법에, 관련 교육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돼 있다. 이원화된 법을 개선하고, 피해 예방을 위한 예산·인력·시설 등을 갖추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조항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그래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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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기자 beewoo@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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