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향상된 동물복지' 진심 다하는 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
60년간 동물 보호문화 확산에도 관련 법안은 사실상 '입법 지체'
질병들 초기 진압할 진료권 확보·농장 주치의 등 제도 도입 절실
업계 목소리 반영에 힘쓸것… 제대로 된 인식변화·정착에 최선을
"동네에 전염병이 돌더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시름시름 앓더라고요. 급하게 자전거에 태워 읍내 가축병원에 갔더니 원장님이 다급하게 말해요. 빨리 가서 죽기 전에 잡아먹으라고. 그때는 그랬어요."
인천시수의사회장을 거쳐 2만3천여명의 수의사를 대표하는 허주형(58) 대한수의사회장은 처음 수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유년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허주형 회장은 대한수의사회 설립 72년 만인 2020년 첫 직선제 회장으로 선출된 뒤 지난해 재선 임기를 시작했다.
허주형 회장이 어릴 적에는 아픈 동물을 데려가는 곳은 '동물(動物) 병원'이 아닌 '가축(家畜) 병원'이었다. 가축병원은 주로 농가에서 키우는 소, 돼지, 닭 등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곳이었다. 지금처럼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집안에서 기르는 동물을 치료하는 동물병원과는 그 역할과 기능이 조금 달랐다.
1970~1990년대 시골 마을에는 개 전염병이 수시로 돌았다. 개 전염병은 2000년대 들어서 병원 예방접종이 보편화하고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만연했었다. 그때마다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개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내고 약을 받거나 주사를 놓는다는 인식이 없었으니 가축병원에서도 "잡아먹으라"는 처방이 최선이었다.
"집에 데려온 강아지에게 이것저것 줬더니 다른 건 못 먹어도 우유는 곧잘 먹더라고요. 밤낮을 들여다보면서 보살피니 기력을 찾았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총 18년간 함께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웠던 경험은 수의사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줬습니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유독 컸던 배경에는 시대를 앞서간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카투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평소 미군들이 강아지를 친구, 가족으로 여기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미군은 한국 개 식용 문화에 놀라워하면서 한국인 직원들에게 "개는 먹는 게 아니라 친구, 가족"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개고기로 만든 보신탕은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명절, 동네 행사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허주형 회장네는 예외였다. 반세기 전에도 개고기 소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온도차가 있었으니 개 식용이 법적으로 금지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허주형 회장은 정부의 개 식용 금지 방침 통과를 두고 "문화에 비해 제도가 다소 늦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에서 식용을 목적으로 개를 사육·증식하거나 도살하는 행위, 개나 개를 원료로 조리·가공한 식품을 유통·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시아권 국가에 만연했던 개 식용 문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 대만 등 곳곳에서 사라졌다.
그에 비해 한국은 반려동물, 동물보호 문화가 빠르게 확산됐으나 관련 법안은 마련되지 않아 사실상 '입법 지체'에 놓였던 셈이다.
"시대적으로도 개 식용을 금지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히 갖춰졌습니다. 오히려 법 제정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시민문화가 성숙하면서 우리 사회는 법 제정에 앞서 일찍 개 식용을 멀리하게 됐습니다. 의식이 법을 앞서간 것이죠."
이처럼 동물복지·동물권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돼야 할 사항이 많다는 게 허주형 회장 설명이다. 동물·가축 전염병 관리체계에서 수의사의 공적 역할을 제한하면서 대규모 '재난형 전염병'이 반복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에도 전국 농가에 럼피스킨(LSD),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조류독감(AI) 등 동물전염병이 발생했다. 일본·대만 등 인접 국가에서 더 이상 구제역과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 모습과 대조된다. 현재 동물 전염병은 농장주가 신고하고, 수의사가 진단해 정부에 전염병을 신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전염병 확산 차단을 위한 백신 접종은 사육 동물이 일정 규모 이상되면 농장주가 맡는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 정부는 효율적 방역이라는 이유로 한꺼번에 많은 동물을 살처분한다. 허주형 회장은 수의사 등 전문 인력이 지역 대규모 전염병을 초기에 차단할 수 있도록 '수의사 진료권 확보' '농장주치의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으로 한 국가에서 이렇게 많은 재난형 전염병이 퍼지는 곳은 한국이 유일합니다. 전염병 관리의 핵심은 차단과 방역에 있습니다. 수의사는 동물을 볼 때 '어디가 아플까' 유심히 보지만, 농장주는 '잘 크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니 질병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 진단과 검사, 치료 권한이 수의사에게 있어야 합니다."
허주형 회장은 동물감염병 대응 등 공공분야에서 수의사들이 충분히 유입되도록 전담업무 전문성 강화, 처우 개선 등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질병관리청 등 동물감염병 대응이나 관련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현장에서도 좀처럼 수의사를 찾기 힘들다. 허주형 회장은 수의사 구인난이 열악한 처우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
허주형 회장은 "시·도에 수의사들이 7급으로 들어가는데, 소수 직렬이다 보니 승진 자리가 없어서 30년 근무하고도 6급으로 나온다"며 "공공에 많은 수의사가 자리 잡고 있어야 축산 등 여러 분야 정책 발굴은 물론, 감염병 대응에도 발 빠르게 대처하는데 처우가 열악하니 다들 기피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2만3천여명의 수의사 중 현장에서 활동하는 수의사는 1만5천명 정도다. 이 중 6천여명이 동물병원에서 임상수의사로 근무하고 나머지는 민간기업에서 의약품·백신·바이오·유전공학 연구·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질병관리청, 지자체 등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인력은 일부에 불과하다.
허주형 회장은 남은 임기 정부 입법에 수의사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힘쓰는 것은 물론 동물복지를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동물복지가 이뤄진 국가에서 사람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허주형 회장은 인천시수의사회장 재임 시절 계양구에 유기동물 보호소를 설립하면서 버려진 동물 입양 활성화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힘쓰기도 했다. 당시 보호소에 있었던 유기견 모모·몽실이·준이와는 10년 넘게 가족으로 함께하고 있다.
"동물을 어떻게 보호하고 키울지, 동물과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동물을 바라보는 이 같은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를 위해 수의사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글/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은?
▲1966년 경상남도 사천 출생
▲1991년 경상대학교 수의학과 학사 졸업
▲1991~1993 경상대 대학원 석사
▲2002~2011 경상대 대학원 박사
▲2004~2014 인천시수의사회장
▲2008 제25대 대한수의사회 부회장
▲2014~2017 세계수의사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집행이사
▲2014 한국동물병원협회 회장
▲2020.3~ 제26·27대 대한수의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