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법생(法生) 담은 '마지막 주문'… "자신의 '집'에서 평온하길"
지난달 '미추홀구 건축왕' 남헌기에 '법정최고형' 징역 15년 선고
고심끝 118쪽 달하는 판결문 작성… 이례적으로 '형량 개정' 역설
재판 마치고 한 청년의 인사 감동… "존중받을 권리 모두에 있어"
장장 308일간의 재판이었다. 정년퇴임을 앞둔 판사는 출·퇴근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사무실에서 쪽잠을 잤다. 지난해 여름 법정 휴정기에는 휴가도 반납했다. 오기두(62)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마지막 재판에 그의 30년 법관 인생을 담았다.
지난달 7일 열린 재판에서 그는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속칭 건축왕 남헌기(62)에게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일당 9명에게는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다.
오 전 판사는 "해군 법무관 시절까지 합치면 약 35년을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다"며 "판사 재임기간엔 내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국민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지난해 4월5일 건축왕 관련 첫 재판 날, 오 전 판사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고인의 유·무죄를 속단하지 않는 판사의 의무를 지키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법관의 양심에 따라 피해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남씨 측 변호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였다.
오 전 판사는 "남씨 측 변호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언뜻 봐서는 사기죄 성립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그런데 심리를 하면 할수록 대법원에서 요구하는 사기죄 성립 요건에 적합하다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남씨 일당은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인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세입자 191명에게서 전세보증금 148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섰다. 피해자들이 파악한 피해 가구는 총 2천753가구, 보증금 금액으로는 대략 2천억원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도 많다는 것이다.
오 판사는 "2천700가구에 달하는 집을 어떻게 개인이 운영했는지, 왜 등기부등본상에는 실제 집주인인 남씨가 없는지, 왜 공인중개사를 고용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일당이 피해자들에게 정말 '나쁜 짓'을 했구나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피고인의 유죄를 확정하고 그는 큰 고심에 빠졌다. 일당의 엄벌을 탄원했던 주민들, 법정에서 울며 안타까운 사연을 토로했던 피해자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에 나온 예수의 고통이 조금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며 "어떻게든 피해자들을 구제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 마음고생이 컸다"고 했다.
고심 끝에 그는 118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작성했다. 일반적인 단독 법정에서 나오는 판결문보다 약 4배가량 긴 분량이었다.
그는 선고 날 법정을 가득 채운 피해자들과 취재진 앞에서 담담하게 판결문을 낭독했다. 다음은 오 판사가 작성한 판결문의 일부다.
"이 사건 피해자들의 각 임대차보증금은 피해자들이 대출을 받거나 퇴직금이나 평생 일하여 모은 돈으로서 피해자들의 거의 유일한 재산이다. 피해자들이 앞으로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채무는 피해자들의 재정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막대하다. 피고인들은 피해자들로부터 살아갈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와 함께 오 전 판사는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피해 사실도 읽어나갔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웃들의 사연에 피해자들은 눈물을 터트렸다.
그는 "자연인 오기두가 아닌 대한민국 법관 오기두로서 감정을 최대한 빼고 판결문을 읽으려고 노력했다"며 "그런데도 마음이 참 아팠다. 내 딸이, 내 아들이 그런 말(증언)을 했다면 가슴이 턱턱 막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오 전 판사의 판결문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례적으로 법정에서 사기죄 형량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판사로서 입법론을 함부로 논하면 안 된다. 3권분립 원칙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라면서도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현 법률이 부족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기죄 개정을 주장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의 피해자만 191명, 3인 가족으로 치면 500여명이다. 2천700가구를 기준으로 하면 약 1만명의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며 "이 인구는 투표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숫자"라고 말했다.
이어 "집 문제는 '의식주'의 문제이고, 이런 의식주의 차이는 인간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단순한 사기 사건이 아닌 '인권문제'이자 '사회문제'라는 뜻"이라며 "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오 전 판사는 이 사건을 지켜본 국민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으로 안 되는 것"이라며 "함께 사는 세상에서 존중받을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또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와 언론에도 책임감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오 전 판사는 "피해자들은 호화롭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평온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할 뿐"이라며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자신의 '집'에서 평온히 살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 재판이 끝난 후 법정을 모두 빠져나갔을 때, 한 청년이 홀로 남아 오 전 판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청년의 "감사하다"는 인사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 전 판사는 벼랑 끝에 몰려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가는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큰 위로가 돼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도 위로가 됐다고 하니 참 감사합니다. 마음 굳건히 잡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신념을 버리지 말고 자책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 전 판사는 이 판결을 끝으로 지난 2월 30년 넘게 입은 판사복을 벗었다. 지금은 수원 광교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끝으로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면서도 "지난 세월을 국민들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보듬는 사람이 되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글/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사진/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오기두 前 부장판사는?
▲1986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원 법학과 등 수학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 합격
▲전주지법·서울고법 판사, 수원지법·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역임
▲2024년 2월19일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