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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아임 프롬 인천·(22)] 돛단배 타고 인천으로 피란왔던 박영복입니다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출생
남포제련소 유명 "인천과 닮은 도시"
1·4후퇴때 떠나, 전후 부평서초 입학

중학시절 선생님 영향 역사학도 꿈꿔
사학 전공… 서클 통해 고고학 접해
대학원땐 '경주 고적발굴' 조사 참여
국민적 관심… 박정희 대통령 방문

역사·고고학자·문화재 행정가 일생
"인천, 옛 것속 현재 그리는 것도 중요"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

"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

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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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중학교.

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

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촌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은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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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 위가 박영복 전 관장이고, 오른쪽이 어머님이다. /박영복 전 관장 제공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

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

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

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

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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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재학시절 박영복 전 관장. /박영복 전 관장 제공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서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서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서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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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

아임프롬인천 박영복
기사 전문 온라인
"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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