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의 '와룡추'
힘찬 물줄기·기암괴석 멋… 아름다운 경치 '가평 용추구곡 제1곡' 산수화
벚꽃에 한눈파는 사이 초록이 번지는 속도가 심상찮다. 늦기 전에 어디로든 나서야 짧은 봄의 한 자락이라도 맞이할 터. 경기도미술관의 소장품인 민정기 작가의 작품 '와룡추'를 들뜬 마음 앞에 내밀어본다.
'와룡추'는 가평군에 있는 용추구곡의 제1곡 '와룡추'를 그린 그림이다. '용추'는 용이 승천한 곳, 혹은 그런 용의 모양새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겠고, '구곡'은 그 장소를 아홉 구간으로 나누어 따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뜻.
이런 구곡의 풍경을 그린 '구곡도'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열었던 조선의 문인들이 많이 그리고 감상했던 산수화다. 당시 문인들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시대의 학자 주희를 숭앙했는데, 그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학문을 논했던 중국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를 그린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면서 대학자의 높은 정신과 학문적 성취를 흠모했던 것이다. 그러니 '구곡도'는 눈앞의 산수를 바라보며 풍경을 넘어 삶의 이치를 그려보게 해주었던 그림인 셈이다.
'무이구곡도'가 유행한 이래 조선의 학자들은 스승이 머물던 곳, 또는 그 자신의 주변 산수에 있는 계곡을 찾아 이와 같은 맥락의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던 도산을 그린 '도산도', 율곡 이이가 머물던 고산을 담은 '고산구곡도'와 같은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 이유다. 우리 땅 여기저기에 '구곡'이라 불리는 곳은 학계에 보고된 것만 60여 개소에 이르고 서울과 경기, 강원에 걸쳐 있는 구곡은 8개로 알려져 있다.
민정기 작가가 살고 있는 경기도 양평에도 '벽계구곡'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학자 이항로가 거처하며 경영한 곳이다.
작가 본인의 삶의 터전이 '구곡'으로 이름 짓고 옛 학자의 정신을 따랐던 조선 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벽계구곡을 몇 번이나 답사한 후에 민정기 작가는 작품 '벽계구곡'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와룡추' 역시 그저 힘찬 물줄기와 기암괴석의 멋진 풍경만이 아니라, '용추구곡'이 쌓아온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다름없다.
제아무리 이야기의 뜻이 높다 한들, 일단 경치가 아름답지 않으면 '구곡' 칭호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용추구곡은 생태적, 경관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국가산림 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고, 용추구곡이 포함된 '연인산 명품계곡길'은 산림청이 주관한 좋은 명품 숲길 경진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구간은 경기둘레길 가평19코스와도 경로를 공유한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조선의 학자들처럼 주자의 뜻을 좇지 않은들 어떠하리. 몸을 활짝 펼쳐낼 풍경에 마음을 내맡길 수만 있다면,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만끽하는 내 삶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면, 오늘 용추구곡이 있는 가평 연인산도립공원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길 일이다.
/황록주 경기도미술관 기획운영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