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년 넘는 국가보호수와 고목 어우러져
풍경 깊이 더해 사계절 아름다운 건축물
순교자 32위 모신 성지, 순례길 시작구간
드비즈 신부 설계로 1922년 서양식 완공
고딕양식 장식 배제한 한국식 벽돌 고딕
충남 아산 인주면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은 충남도 지정문화재 144호로 12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아홉 번째, 대전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됐다.
사계절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성당은 신도뿐만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주변에는 350년이 넘는 국가보호수 4그루와 그에 버금가는 고목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풍경에 깊이를 더한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며 '미남이시네요', '태극기 휘날리며', '아이리스2' 등 지금까지 약 70여 편이 촬영됐다.
■ 공세리 성당의 시작
공세리 성당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공세리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Emile Pierre Devise, 1871-1933)가 1897년 다시 공세리로 부임해왔을 때 성당 건립을 위해 대지를 매입한 사실이 '구한국외교문서'의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드비즈 신부와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을 통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성당 건립을 시작, 1899년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완공해 합덕 본당의 퀴트리에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개최했다.
준공된 성당은 '한옥 성당'으로 성당으로서의 집회 기능을 충족하면서 우리나라 토착 문화를 그대로 전승했다. 사제관과 연결된 'ㅁ'자 평면형으로 흙벽과 기와지붕, 마룻바닥 외관 등 한옥 목조건물 모습으로 알려졌다.
드비즈 신부는 이후 기존 본당이 증가한 신자를 수용하기에 협소해지자 새롭게 서양식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해 1922년 10월 8일 충청도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완공했다.
■ 에밀 드비즈 신부
드비즈 신부의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 이름은 성일론이다. 1871년 프랑스 남부 출신으로 1890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1894년 신품을 받아 사제가 돼 조선 선교의 사명을 받아 일본을 거쳐 같은 해 10월 인천항구를 통해 입국했다.
그는 공세리 초대, 3대 주임신부로서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직하다 1932년 병이 깊어져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933년 고향에서 사망했다.
건축, 예술, 의술에 관심을 가졌던 신부는 '이명래 고약'으로 발전한 '성일론 고약'을 만들어 종기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드비즈 신부가 지은 공세리 성당은 이후 합덕성당(1929), 예산성당(1934), 공주 중동성당(1936) 등 다른 성당의 건축 모델이 됐다.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공세리성당박물관에는 프랑스에 있는 그의 묘지석을 재현해 놓았다.
또 신부의 손자가 기증한 금장(金裝) '드비즈 서간집'과 묘에서 직접 가져온 흙을 전시해 추모하고 있다.
■ 천주교 순교 성지
한국 천주교회는 신유, 기해, 병오, 병인 등 4대 박해 동안 1만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공세리 성당은 이 중 32위의 순교자 현양비와 현양탑이 있는 천주교 순교 성지이자 솔뫼성지까지 잇는 천주교 순례길의 시작 구간으로 의미가 크다.
32위 순교자에는 신유박해 때 아산 최초로 순교한 하 발바라가 있으며 병인박해 때 걸매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의서(사바), 박원서(마르코), 박익서(세례명 미상)를 비롯해 부부 순교자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삼 부자(父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등이 포함됐다.
하 발바라를 제외한 순교자 대부분은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끌려가 고문, 옥사, 참형으로 순교한다.
하 발바라는 1825년 전교하다 체포돼 해미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심문과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1835년 고문 후유증으로 아산에서 숨을 거둬 첫 순교자라 한다.
■ 공세리 성당의 모습과 변천사
공세리 성당은 1922년 준공 당시 고딕 형식으로 트란셉트(세로로 길쭉한 구조인 성당에서 예배를 진행하기 위해 제단 앞을 가로로 길게 만든 공간)가 없는 긴 凸자형의 평면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3랑식 장방형 성당은 종탑부, 신자석, 제단부, 제의실로 구성됐다.
1971년 증축 과정에서 트란셉트 부분을 추가해 T자형 평면이 됐다. 이 과정에서 제단은 배면부로 밀려나 트란셉트를 둔 대규모 평면으로 확장되고 회중석(성당 내부에서 성당 정면과 제단 사이에 있는 공간)은 총 6칸으로 확장, 내부 기둥까지 철거해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첨두 아치와 외벽을 지탱하는 반 아치형 석조구조물(플라잉 버트레스) 등 고딕 양식의 주요 장식적 요소를 배제해 비교적 간략하게 표현한 한국식 조적식(벽돌) 고딕성당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특히 다양한 장식 벽돌을 사용해 시각적 미감을 일으켜 서울 명동성당과 비슷한 모습이다.
성당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파사드)은 비교적 1922년 건물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적색 벽돌과 회색 벽돌을 사용한 면은 고딕형식 성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 출입구 내부 천장은 반원형 아치 형태로 된 천장구조로 각 공간마다 회색 벽돌처럼 표현한 목재 갈빗대 모양의 뼈대(리브)가 있으며 측랑 부분은 평천장으로 마감해 목재판을 그대로 노출 시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제관은 지붕 경사면에 돌출한 작은 지붕이 있는 창문(도머창)을 둔 당시 서양식 사제관 건축의 전형이다. 2층 규모의 벽돌 건물로 정면이 팔(八)자 계단으로 2층을 오를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으며 계단 아래에 1층 입구를 뒀다.
/대전일보=윤신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