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문학이 표상한 사상, 사계절에 비유

반복되는 역사·사상 속 문학이 남긴 무늬 탐구

 

민족주의·사회주의·유토피아·보수주의 ‘4부’

이광수, 신채호·한설야, 이민진, 김훈 등 살펴

연구자·평론가 이경재 교수 20번째 단독 저서

‘한국현대문학과 사상의 사계’ 표지.
‘한국현대문학과 사상의 사계’ 표지.

■ 한국현대문학과 사상의 사계┃이경재 지음. 역락 펴냄. 416쪽. 3만5천원

최근 문학 연구가 풍속, 감각 등의 영역에 치우치면서 과거보다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 시대의 문학을 움직이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 있다면 민족주의, 사회주의, 보수주의 같은 ‘사상’일 것이다. 시대의 사상을 표상한 문학을 다룬 진중한 학술서 ‘한국현대문학과 사상의 사계’가 출간됐다.

책 제목으로 쓰인 ‘사계’(四季)는 일본의 문예평론가·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 그리고 마르크스와 헤겔의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착안했다. 저자인 이경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역사로부터 배태돼 나오는 사상 역시 반복을 구조적 속성으로 삼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사상의 반복성을 사계절에 비유했다. 저자는 “역사의 특정 시기에는 하나의 사상이 절대의 것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지만, 그것은 곧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상의 운명”이라며 “각각의 시대는 고유한 모순을 지니며, 그렇기에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사상 역시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룬 문인들은 모두 자신이 대면한 시대나 문학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그들의 문학이 지금까지도 성찰되는 이유는 그들이 보여준 시대나 문학에 대한 응전이 나름의 무늬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은 4부로 구성됐다. 1부는 춘원 이광수를 다룬 ‘이광수의 진실을 찾아서’다. 민족주의자에서 반민족주의자로 돌아선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전개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한국 근대문학의 어둠도 온몸으로 구현한 존재다. 저자는 현재까지 이뤄진 대표적인 이광수 독법의 사례들을 통해 그의 문학을 살피고, 이광수 문학을 인류학적 시선으로 탐구한다.

2부 ‘근대를 넘어서려는 정치적 기획’은 근대의 핵심적 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작가 신채호, 한설야, 임화, 이병구 등을 조명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식민주의 문제 등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로운 인식을 보여준 작가다. 신채호와 한설야의 관계를, 일제 말기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한설야와 임화가 어떻게 자신의 사상을 유지해나갔는지를, 또한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병구가 형상화한 일제 말기 일본군 체험을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논의했다.

3부는 한국 현대문학에 엄연히 존재하는 유토피아 지향성을 살핀 ‘이상향에 대한 갈망’이다. 저자가 조명한 유토피아는 공상에 바탕한 현실 도피가 아닌 강렬한 현실 저항의 힘을 지닌 정치적 개념에 가깝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유토피아 지향성은 현실의 절망이 농후해지는 시기에 그 면모가 뚜렷해졌다. 저자는 이효석과 김사량이란 일제 말기 문제적 작가가 각자의 이상향을 통해 디스토피아가 돼 가던 조선을 향해 발언하고자 했던 바를 경청하고자 했다. 또 손장순의 산악소설과 이민진의 데뷔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완숙기에 접어든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삶을 향한 초월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찰했다.

4부 ‘삶의 기층에 대한 탐구와 중시’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발견되는 보수주의를 주목했다. 보수주의는 아직 문학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된 바 없으며, 이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한 결과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무언가를 지키고 유지하기 보다는 부수고 건설하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던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몇몇 문인은 삶의 본바탕에 대한 성찰을 보여줬다. 저자는 국어학자 남광우의 수필과 김훈의 소설만이 보수주의라는 개념에 부합한다고 봤다. 이병주의 소설과 이청준의 소설은 정치 사상으로서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있지만, 오래 지속돼 온 일상의 감각과 윤리를 중시한다는 면에서 보수주의의 카테고리로 살폈다.

지난해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문예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묘소를 찾은 이경재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경재 제공
지난해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문예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묘소를 찾은 이경재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경재 제공

이 책은 왕성한 연구 활동과 평론으로 널리 알려진 이경재 교수의 20번째 단독 저서다. 책 날개 부분 ‘저자 소개’에 실린 사진 속 이 교수는 낯선 외국어로 가득한 묘비 옆에 웅크려 앉아 있다. 지난해 10월 부다페스트에 있는 문예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묘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정리하면서 자신의 학창 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준 루카치가 생각났다고 한다. 13시간 비행 끝에 부다페스트를 찾아 루카치의 남은 자취를 밟아봤다.

좋은 글과 제대로 된 문학 연구를 위해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는 저자의 이 같은 태도는 시류보다 본류를 좇고자 한 이번 책에서도 묻어난다. 저자는 한국 문학의 사상을 탐구한 이번 책을 필생 과제인 한국현대문학사 연구의 시론으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