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공무원에 화풀이하는 사회… "친절은 서로 지켜야 할 도리"


공무원 협박 잇단 실형·폭언시 통화종료 등 '일부 사법·행정 변화'
그럼에도 욕설·기물파손, 근절 안 돼… '무조건 봉사' 왜곡된 인식
"영국은 악성민원인 출입 제한… 싱가포르, 더 엄하게 괴롭힘 처벌"
모호한 '친절 의무' 규정도 문제… "국민 인식 바뀌는 게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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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김포의 청년공무원이 좌표 찍기와 민원폭주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진 지 꼭 100일이 됐다.

포트홀 보수공사에서 비롯된 이번 사건은 고인이 밤늦게까지 현장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무책임하게 본분을 저버린 것처럼 매도됐다는 점에서, 사실관계는 뒷전으로 밀린 채 무차별적인 사적제재가 자행됐다는 점에서 공분을 일으켰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다가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뒤늦게 공직에 입문했다는 고인의 사연은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전국의 공무원들은 악성민원의 칼날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 있다며 강하게 연대했고, 정부는 유례없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공무원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고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사회의 뿌리 깊은 장벽 앞에 가로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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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9일 오후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악성민원 희생자 추모 공무원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경인일보DB

김포 공무원 사망사건 이후, 이번 만큼은 악성민원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사회 각계가 일제히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행동한 건 일선 공무원들이었다. 기초지자체마다 홈페이지상 공무원들의 신상을 가리거나 웨어러블 캠 또는 신분증 녹음기 등의 보호장비를 속속 보급했다.

고인이 생전 몸담았던 김포시 측은 형사고발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악성민원 대응을 위한 부처합동TF를 꾸리고 국민권익위원회는 악성민원 실태 파악에 나섰다. 정부TF는 전국 각지의 공무원이 민원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하고 잔혹하게 테러를 당할 때도 없었던 조치였다.

정부기관의 판단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숨진 김포 공무원을 비난하고 협박성 전화를 건 민원인들이 경찰의 신속한 수사로 송치됐다.

고용노동청 공무원을 장기간 협박한 민원인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자 검찰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성민원 사건에 엄정 대응할 것"이라며 항소했다. 불법주정차 견인과정에서 외제차량이 고장 났다며 공무원을 협박한 일가족은 항소심에서 1심보다 높은 형을 받았다.

인사혁신처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공무원의 순직을 인정했다. 이전까지 경찰·소방 등 위험직군이 아닌 일반공무원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경우 순직을 인정받기 힘들었다는 걸 고려할 때 이례적이었다. 전부 김포사건 이후에 일어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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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좌표 찍기와 민원폭주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진 김포시 공무원의 추모공간에서 동료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경인일보DB

그런데 이 같은 변화의 시작점이었던 김포에서 지난 5월16일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긴급 복지지원서비스를 신청하기 위해 통진읍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한 민원인이 서류를 보완해야 한다고 안내한 공무원에게 서류를 집어 던지고 욕설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고발된 것이다.

5월22일에는 전북 남원의 한 마을 이장이 민원이 해결되지 않는다며 면사무소 공무원들을 향해 테이블을 던져 칸막이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는 일도 있었다. 악성민원 문제 해결이 요원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들이다.

김포 공무원 사망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과거와 확연히 구분되는 대책을 내놓았다.

민원전화를 처음부터 자동 녹음할 수 있게 하고 폭언이 계속될 시 공무원이 먼저 통화를 종료할 수 있게 했다. 온라인에서 단시간에 민원폭탄을 퍼부을 경우 이용을 제한하거나 동일내용 반복민원에 대해서는 사안을 종결토록 하고, 기관 홈페이지 등에서 공무원 개인정보를 비공개하도록 권고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행정안전부는 후속대책 마련에 총력을 쏟는 등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공무원들은 어떠한 부당한 일을 겪어도 공무원이라면 무조건 친절하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 바꿔 말해 공무원을 하대하는 인식이 남아 있는 한 악성민원은 변함없이 공직사회를 교묘하게 파고들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번 사건 기간 '주요국 민원환경 현황조사 및 법제도 개선방안'을 연구한 김세진 한국행정연구원 박사는 "국민들이 디지털환경에 익숙해져 있어서 잘 못 느끼지만 우리나라 행정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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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한국행정연구원 박사는 "일부 국가에서는 악성민원을 다른 시민의 서비스수혜권을 침해하고 공무원의 정신적·신체적 피해와 행정력 낭비를 초래하는 행위로 보고 엄격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4.6.13 /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

김 박사는 "우리는 세계 1위 전자정부가 구축돼 있고 공무원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난데 미국은 운전면허증 하나 발급받으려 해도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고 일본은 관공서에서 아직도 아날로그 행정을 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thank for your service',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 일상화돼 있다"고 설명했다.

공무원들에게 부여된 '친절의 의무'를 해소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의무사항인 '영리업무 금지'·'정치운동 금지'·'종교 중립' 등과 비교해 유독 잣대가 모호한,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큰 감정의 영역을 법으로 규정하다 보니 '불친절하다'며 감사를 청구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적 족쇄가 공무원을 하대하는 인식을 부채질한다는 지적이다. 전국공무원노조 측은 "친절과 존중은 공무원과 민원인이 상호 지켜야 할 도리이지 공무원의 일방적인 의무가 아니다"라고 호소한다.

하드웨어(정책) 보강을 통해 소프트웨어(인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민원인들이 정책을 맞닥뜨리는 과정에서의 홍보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해외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한국행정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36개 주에서 공직자에 대한 방해·괴롭힘·간섭·위협 등을 처벌할 수 있는 법령을 정비해 뒀다. 일부 주에서는 금속탐지기 설치까지 권고한다.

일본은 악성민원을 '시간구속형', '반복형', '폭언형', '폭력형', '협박형', '권위형', '직장 밖 요구형', 'SNS·인터넷 비방형', '성희롱형' 등 구체적으로 유형화해 놓았다. 행정 일선에서는 사설 경비원을 고용하거나 제압봉·최루스프레이 등 호신용품을 갖추고 대비한다. →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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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무관용이 원칙이다. 그중 잉글랜드는 악성민원인들의 행정서비스 접촉 횟수 및 시간(주당·월당)을 제한하거나 접촉시간대 지정, 접촉방법(전화·이메일·편지 등) 제한, 지자체 출입금지 등의 불이익을 준다. 또 도서관과 레저센터 등 지자체서비스 사용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 밖에 싱가포르는 악성민원인들에게 '형법'과 '괴롭힘방지법' 두 개의 법률을 적용해 일반인 대상 괴롭힘보다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주요국 민원환경 연구를 수행하고 악성민원 재유형화 등 대책을 정부에 제안한 김세진 박사는 "다양한 대응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악성민원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인식 개선이 가장 중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황성규·변민철·조수현기자 homer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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