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 허를 찌른 '삼각의 역설'
고전골격에 'K패치' 덧입혀 재미 더해
삼각계단, 계급성 압축 메타포로 작용
LG아트센터 서울서 내달 7일까지 무대
고전의 무게는 창작자에게도, 배우에게도 자못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이미 전 세계에서 수도 없이 무대에 올랐을 연극을 뻔하지 않게 재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토리에 변주를 주는 것도, 배우의 관록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이먼 스톤 연출의 '벚꽃동산'은 배우 전도연의 27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탄 작품이다. 안톤 체호프의 동명 유작(1904년 초연)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점도 기대감을 높였다. 대개 기대와 실망은 비례하지만, '벚꽃동산(2024)'은 고전을 현대적으로 매끄럽게 소화해내며 예상을 빗겨갔다.

우선 원작의 스토리는 가볍게 풀어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차츰 무너져가는 한 가문과 이 가문이 소유한 벚꽃동산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이 기본 골격을 토대로 'K패치'가 이뤄졌다. 러시아의 지주 귀족은 오늘날 경영 위기에 봉착한 재벌 3세로 탈바꿈했다. 벚꽃동산에 자리한 별장 주인 재벌 3세 송도영(전도연)의 철없는 자유분방함은 막장과 실존적 방황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그런가 하면 이념의 충돌과 계급성 등 다소 무거운 원작의 주제의식은 무대 디자인을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됐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사울 킴은 바닥부터 지붕까지 계단으로 이어진 세모 형태의 현대식 벚꽃동산 별장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 10명의 인물은 삼각형의 빗변을 따라 별장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집주인 송도영과 그의 딸들도, 그리고 운전기사와 가정부도 모두 자유롭게 지붕 꼭대기까지 오간다.


특히 이 거대한 삼각형은 극의 기승전결과 인물의 희로애락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별장 앞에서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황두식(박해수)과 이상주의자 변동림(남윤호)의 가치관이 부딪친다. 이들의 논쟁은 삼각형의 하단 밑변을 수평적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맞붙는다. 반면 언쟁은커녕 문제를 아예 외면하는 인물, 송도영은 변화를 코앞에 두고도 현실 회피적인 성향을 고수한다. 송도영이 삼각형의 맨 하단 꼭짓점 구석으로 조금씩 몰리는 상황은 의미심장한 장면 중 하나다.
극이 막바지에 달할수록 이 거대한 삼각형이 사실은 인간 사회의 계급성을 압축해놓은 일종의 '피라미드 별장', 메타포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들어서는 정반합의 과정을 서사는 물론이고, 눈앞에 보이는 삼각형 형상을 통해서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체호프가 살았던 19세기 말과 2024년을 연결짓고자 만든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유머러스한 대사만으로는 원작의 무게감을 재현하기 까다롭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마치 아주 정교하게 짜인 도식 같은 '피라미드 별장'. 극중 인물들이 무수히 오르고 내렸던 이 공간은 그렇게 원작의 무거운 메시지를 다시금 부활시켜 오늘날의 관객에게 전한다. 누구나 계단을 타고 별장을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을지라도, 자본 권력이라는 꼭대기 계층이 엄연히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더 나아가 시대 흐름을 좇지 못한 무능한 자본 권력이 도태한 자리엔 또 다른 자본 권력이 똬리를 틀고 새로운 피라미드 구조를 재건하고 만다는 부조리를 말이다.
'벚꽃동산'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놓은, 12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공연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다음 달 7일까지.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