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이룬 동포… 도포자락 휘날리며 국토종주


한국인의 정체성 잊지 않으려
낮엔 일, 밤엔 韓역사 공부 매진
월남 파병도 자처… 이젠 인생2막
"우리 전통 안지키는 듯해 아쉬움"
직접 고국땅서 홍익인간 계승




'白衣從軍(백의종군)'.

등허리에 짊어진 깃발 속 네 글자는 정갈했다. 머리에는 갓을 쓰고 있는가 하면, 손에는 기다란 죽봉도 들었다. 흡사 조선시대 선비의 환생 같은 윤봉한(76)씨의 모습에 거리의 시민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빛 바랜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난 10일 경인일보 본사에 등장한 그는 첫 인사부터 "'망건'을 잃어버려 격식에 맞지 않는 차림새라 미안하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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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보수적으로 전통을 고수하는 모양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상하게도 그의 답변에서는 중간중간 영어 문장이 섞여 나왔다.

"No guts, no glory."

 

[포토] 이민 1세대 윤봉한씨(공감 인터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970년대 미국으로 떠난 이민 1세대 동포 윤봉한씨가 "김구 선생, 이순신 장군 순례길 완주를 통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용기 없이는 성공도 없다'는 자신만의 신조를 아주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읊었다. 70대 남성, 한복 차림 그리고 세련된 영어 발음이 맞물려 궁금증을 자극했다. 하얀 도포자락에 더해 햇볕에 그을린 듯 보이는 피부도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970년대 미국으로 향했던 이민 1세대 동포였다. 현재도 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고 있다.

더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으로 지난달 10일부터 장장 한 달가량에 걸쳐 전국을 일주했다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에 나섰던 길을 좇아 두 발로 돌았다고 한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잠시 깃발을 내려놓고 영어 공부에 매진했던 젊은 시절부터 순례에 나선 지난달까지를 차근차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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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쯤에 미국에 이민을 갔어요. 지금까지 46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살면서 그래도 죽기 전에 인생의 마지막을 보람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젊은 시절 조국을 위해 희생하며 애국하신 분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조금이나마 조국에 보탬이 되고자 젊었을 때는 월남에 파병을 갔다 오기도 했고요. 현재는 존경하는 인물들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순례에 참여하고 있어요. 2년 전에는 김구 선생의 여정을 따라 일주했습니다. 올해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순례길을 따라 갈 수 있어 더없이 영광스러웠습니다."

윤봉한씨
윤봉한씨가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순례길 여정에서 남긴 기념 촬영 사진. /윤봉한씨 제공

충무공 이순신 순례길은 서울에서 시작해 경남 합천에서 마무리되는 난코스다. 그는 지난달 10일 그러니깐 음력으로는 4월3일이던 그날, 1597년 당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에 나선 때에 맞춰 일정을 시작했다. 고단했던 여정은 지난 8일 경남 합천의 낙민2구 마을회관에서 마무리됐다.

그는 "마지막 날 비가 와서 무척 힘들었지만, 앞서 이순신 장군이 겪었던 상상도 못하는 고생을 한번이라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며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패스포트'에 찍힌 마지막 46번째 도장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마냥 뿌듯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난한 순례길을 돌아보면서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산을 넘기 힘든 길이라고, 모두가 가지 못한다고 했던 길을 올라가는데 이곳저곳 긁히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었다. 단순히 힘들다는 게 아니라, 그 험상궂은 시대를 이순신 장군이 외롭게 걸었을 것을 떠올리니 감정이 북받쳤다. 그 참뜻을 본받아 저도 묵묵히 걸어갔다"고 말했다.


윤봉한씨
윤봉한씨가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순례길 여정에서 남긴 기념 촬영 사진. /윤봉한씨 제공

순례에 참여하는 무수한 시민 중 유독 윤봉한씨가 돋보이는 이유는 특유의 복장에 있다. 그는 하얀 도포를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전국을 일주했다. 전통복장을 고수하는 이유에는 왠지 모를 이민 1세대의 한이 서려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간 뒤에 고국을 늘 그리워했다. 힘든 와중에 어쩌다 고국에 방문할 기회가 생겨서 와보면 한 사람도 우리 전통의 것을 지켜나가려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게 늘 마음속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고 힘줘 말했다.

윤봉한씨가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된 과정은 제법 드라마 같았다. 전남 장흥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생 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등굣길이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든 영어 단어와 숙어를 끊임없이 외웠다고 한다.

영어 실력은 월남 파병에 지원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배에서 만난 미군들과도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월남에 있을 때도 당시 출간됐던 '할리우드 스타일 생활영어'를 늘 지니고 다니며 5번을 통독했다.

제대한 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전남 지역에서 3명을 뽑아 미국으로 파미 실습생을 보낸다는 것. 1등으로 선발된 그는 그렇게 1973년 처음 미국으로 가 일년간 이곳 농장에서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마음속에 품었다.

이듬해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다 농장에서 인연을 맺은 농장주의 초청으로 1978년 본격적으로 영주 이민을 떠나게 됐다. 고군분투 끝에 오리건주의 공무원으로 20여년간 일하던 그는 지난 2015년 은퇴했다.

오랜 시간 타지에 머물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고 살 법도 하지만, 그는 영주 이민을 떠날 당시 비행기에 들고 탔던 전통 복장을 입고서 미국인들 사이를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한번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시험을 해본 뒤에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 것을 우리가 지키고 앞장서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 같아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포토] 이민 1세대 윤봉한씨(공감 인터뷰)1

이민 1세대로서 마주했던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타지에서 찾아온 역경이 오히려 값진 오늘을 만들어줬다고 자부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등 조국의 역사를 부단히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범석 '우등불', 장준하 '돌베개', 김준엽 '장정', 정정화 '장강일기'는 고국에서 소중히 들고간 서적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해준 일등공신이다.

"인생을 사는 어떤 과정이든지, 그 과정을 지나가면서 무엇인가는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덜 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절대로 '나만 힘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을 견디며 지내왔기에 저는 오늘날 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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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지냈다던 윤봉한씨.

이렇게 그는 안정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던 인생의 첫 번째 막에 이어, 두 번째 막을 이따금 고국에 돌아와 새롭게 펼쳐내는 중이다. 어쩌면 한국인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미라클한 것을 이뤄낸 지금의 한국이 있는 건, 앞서 힘든 여정을 지나왔던 조상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이야기하며 앞으로의 무궁무진한 꿈을 들려줬다.

윤봉한씨 인터뷰 큐알코드
인터뷰 영상
"내 조국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홍익인간의 이념이자, 옛 조상님들로부터 이어받은 깊고 넓은 큰 정신의 세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김구 선생, 이순신 장군 순례길을 완주했으니 언젠간 한 번쯤은 김구 선생이 태어났던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과 중국 단둥까지도 가보고 싶습니다. 역사, 문학, 지리적으로 굉장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 마음 한구석에 늘 간절한 바람을 간직하고 있죠."

글/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윤봉한 씨는?

▲1948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봉동리 출생
▲전남 장평초, 장흥동중(現장흥장평중), 보성농업고(現다향고) 졸업
▲1978년 10월 미국으로 이민
▲2022년 백범 김구 순례길 완주
▲2024년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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