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의 '섬으로부터'
'오리형상' 리드미컬한 필획 잘 표현돼
"의도할 까닭 없어" 물아일체 사상 체화
'그 누가 새 붓을 잡고서(何人把新筆) 강물 위에 새 을(乙)자를 그려놓았나(乙字寫江波)'
물 위를 기운차게 유영하는 오리를 보며 길들여지지 않은 '새 붓'으로 '새 을'자를 그려놓았다는 기막힌 표현을 남긴 이는 고려시대의 문인 정지상(鄭知常)이다. 그가 다섯 살 혹은 일곱 살 때, 심지어는 두 살 때 지었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전설까지 이 시에 따라붙는 걸 보면 고려 문학을 폄하하던 조선 문인들이 문학천재 정지상의 시만큼은 후대에까지 찾아 읽었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시를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레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강소의 그림이다. 그는 '오리화가'라고 불린다. 꽤 많은 작품 속에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오리 형상의 붓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 까닭을 궁금해 하지만 정작 작가는 '오리가 그리기 쉬워서'라 말할 뿐이다.
어느 해 겨울 대공원에 갔는데 호수 위 얼음 덩어리 사이로 오리가 움직이는 '생동(生動)'의 장면을 그려보려 했던 것이 우연히 오리를 그림에 담게 된 이유였다. 오리로부터 시작한 이미지이긴 하나 안개와 물, 구름이 될 수도 있고, 그 어떤 것들보다 필획의 리드미컬한 손의 감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경기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강소의 작품, '섬으로부터'에도 역시 오리가 등장한다. 거칠고 속도감 있는 붓질을 보면 그림 속에는 분명 바람이 불고 있다. 사나워지는 날씨에 오리들은 화폭 바깥까지 달아날 기세로 서둘러 돌아가야 할 곳을 찾거나, 아예 물속으로 자맥질을 해서 몸을 숨겨본다.
바삐 몸을 움직여내지 않는다면 저 바람에, 혹은 바람이 일으키는 물보라에 기억도 형상도 없이 갇혀버리거나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피해야 할 일인가. 그 바람에, 물결에 나를 내맡기고 한 몸이 되는 일은 도저히 아니 될 일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처음 바람을 피해 줄달음을 치던 오리가 거센 바람과 물줄기와는 무관하게 그저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으로 돌변해있다. 휘몰아치는 흐름에 형상이 사라져버린 저 붓질 또한 과연 그것이 함께 노닐던 오리이기는 했던지를 궁금해진다.
이강소 작가는 자명하고 불변해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가공스러운 꿈과 같은데, 스스로 그림에 어떤 의도나 의미를 담을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작품은 작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보는 이의 자유를 마음껏 끌어낼 수 있는 멍석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시공간이 동시에 여럿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하고 그러므로 나와 사물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 동양의 사상을 체화했다. 그리하여 경기도 안성에 있는 그의 오랜 작업실에서 매일매일 수행하듯 그어내는 필획이 화폭과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러나는 이미지의 실체가 그저 자신의 그림이라고 말한다.
노년의 화가 이강소는 천 년을 먼저 살았던 어린 시인 정지상이 되어 새 을자를 긋고 그린 것일까? 과연 하나의 붓으로 그리는 일과 긋는 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와 그림 두 작품을 앞에 두고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나를 꿈꾼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다시 마주한다.
/황록주 경기도미술관 기획운영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