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행복할 권리 있어… 그런 기대 못한 우리 세대, 태극기부대로"
율목동서 태어나… 흔적 거의 사라져
일본인묘 있던 곳, 지금 '재개발' 현수막
고교시절, 잘 사는 유럽의 문화 동경
서울대서 평생스승 故 박홍규 교수 만나
"국내 기반 필요" 고전문헌학 유학 권유
독일서 '국민 위해 돈 쓰는 국가' 체험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더 요구해야…
다른 삶 산 기성세대 나라 망한다 인식"
"현실이 전부라는 생각, 스스로 가둬"
낯선 것에 호기심… 먼 미래·과거 흥미
"어쩌면 항구도시서 자란 덕일수도…"
서양 고전 연구가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율목동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인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때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 사람도 모르는 고대 그리스어를 마치 골목길을 헤매듯 한 글자 한 글자 단어의 원형을 찾아가며 익혔다. 동네 언덕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거대한 외항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꾼 시기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율목동은 흐릿했다. 하지만 철학자 이태수를 설명하는데 율목동이 어쩌면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생가도 거리도 모조리 바뀌어서 도저히 그 지역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집 근처에 일본 사람들 공동묘지가 있었고요. 나중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다 없어졌죠."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은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다.
의사이면서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의 '인천한세기'는 율목동에 대해 "야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바로 현재 율목동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을 개척한 선대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밤나무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관가에서는 유식하게 한자로 율목리라고 했음직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향 율목동의 골목 풍경은 이태수 교수의 기억 속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럴싸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따로 없던 시절 골목에 생긴 조그만 자투리 공간, 무너진 집터는 꼬마들에게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그 골목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곳이 꼬마들의 길, 말하자면 우리들의 모임 장소였어요. 반대로 큰길을 우리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행길은 어른들의 길이었던 것 같아요. 행길에 나가서 노는 거는 위험한 일이었고 어른들한테 야단도 맞았죠."
이태수 교수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지난 13일 오후 율목동을 찾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율목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율목도서관 일대는 인천항 개항 이후 해관 통역관으로 일하던 중국인 우리탕(吾禮堂)의 과수원 부지였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 리키다케가 인수해 자신의 주택 겸 별장을 신축했다. 광복 후 미군이 숙소로 사용했다.
도서관 아래쪽으로 이동하면 체육공원과 농구장, 어린이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르신들에게서 이곳이 옛날에는 '풀장'이었고, 훨씬 이전에는 일본인 묘지가 있었다는 설명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공원 아래쪽은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주택들이 밀집해있다. 이태수 교수가 언급한 어린이들만 뛰어놀 수 있던 차도 다니지 못하던 작은 골목이 차 한대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로 남아있었다. '경축, 재개발 후보지역 확정' '도로정비공사' 현수막으로 현재 마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태수 교수는 충남 논산 출신 아버지 이강우씨와 인천 출신 어머니 구숙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교사였다. 어머니는 1919년생으로 인천 태생이었고, 아버지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어머니보다 2~3세 많은 연배였다. 아버지는 중등교사, 어머님은 초등교사로 일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그 이후 어머니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수예점을 운영하며 남매를 돌봤다.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문화적 깊이도 있고 잘 사는 유럽을 고교 시절 꽤 동경했어요. 프랑스나 독일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또 많이 읽었던 작가가 독일 작가였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가르치던 선생님 두 분이 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들이었어요."
이태수 교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사귈 친구를 모두 사귄 거 같다고 말했다. 특히 고교 시절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오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유병우 전 외무부 아주국장, 유필우 전 국회의원이 그의 절친이다. 인천대 시립화 주역인 고(故) 김승묵 변호사는 이태수 교수의 여동생과 결혼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고교 시절 친구들과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기차로 통학했는데, 학교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만나서 함께 기차로 하교했다. 기차를 타고 동인천역에 내리면 술집부터 찾아다녔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동인천역 일대 저렴한 술집이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가난한 시절이니까 동인천역 주변이나 부둣가나 해변에서 '카바이트'로 숙성시킨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어요. 지금 보면 다 악주(惡酒)였네요."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학생으로 공부한 시기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다. 대학 재학시절 한 번도 학기가 제대로 온전히 끝난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데모' 때문이었다. 매년 5월 말부터는 학교를 거의 못 나갔다. 2학년부터 4학년까지 매번 학교가 폐쇄됐다.
이태수 교수는 "평생의 스승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평생의 스승은 철학과의 고(故) 박홍규 교수였다. 이태수는 고대 철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같은 책을 읽어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고전을 공부하게 된 것은 박홍규 교수의 역할이 컸다. 이태수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또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박홍규 교수 강의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차츰차츰 동화됐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 하고 그때 라틴어, 그리스어 교재를 도서관에서 빌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교수님 댁에서 '강독' 공부를 했다. 제자처럼 공부했다.
"교수님이 특명을 주셨어요. 너는 외국에 가면 철학은 물론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고전 문헌학 공부를 해 가지고 와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끔 터를 닦는 게 네가 평생 교수하면서 할 일이다라고요"
스승의 권유로 1973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가난한 시절, 갑부가 아니면 외국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이태수는 'DAAD'라는 독일 정부가 주는 국가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이태수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 한 선배의 이야기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려면 흉부 엑스레이 사진이 필수였다고 한다. 폐질환 환자의 독일 입국을 찾아내겠다는 의도였는데, 폐결핵이 있던 선배가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 사진을 위조해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독일은 1년에 두 차례씩 유학생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엑스레이 검진을 하는데, 입국 후 폐결핵이 발견됐다. 멀쩡한 학생이 학교에 다니다 폐결핵에 걸리니 학교와 보건당국은 비상에 걸렸다. 역학조사에 들어갔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해당 지자체는 기숙사가 위치한 곳의 찬바람 때문에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의심된다면서 더 좋은 환경의 집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개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국민의 권리가 있다고. 우리는 국가가 그런 일을 해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더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세대가 지금 젊은 세대하고 같은 세상을 살지만 바탕이 다른 겁니다. 저는 독일 유학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걸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해보지 못한 우리 또래는 '태극기 부대'가 되고 말았죠. 이러다 나라 살림 망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모교 스승의 부름을 받고 1981년 귀국, 이때부터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89년에는 교무부처장이라는 학교 내 보직을 맡기도 했다. 1994년 그러던 중 교육부 고등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대학정책실장을 맡으며 공직자로도 일한다.
이태수 교수가 대학정책실장 직을 처음 제안받은 것은 1993년이다. 문민정부 초기 어느 날 오병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장관은 전화로 대뜸 "교육부 장관입니다. 할 얘기가 있고 한데 장관실에 놀러 오시죠"라고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1급 공무원으로 오라는 얘기였다. 이태수 교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또 제안이 왔다. 김숙희 장관 시절이었다. 학교 측을 통해 연락이 왔고, 학교를 휴직하고 딱 1년만 파견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2008년 서울대에서 명예퇴직하고 인제대 교수 겸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으로 일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이태수 교수는 언제나 낯선 것에 이끌렸고 호기심을 자극받았다고 한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할 시기에도 경영대학이나 법대에는 관심이 가질 않았다. 한때 마도로스가 되어 태평양을 횡단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낯선 시간에도 이끌렸다. 현재가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나 먼 미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어차피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현실 얘기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아주 먼 미래 얘기나 아주 오래 지난 과거의 얘기, 상상력을 동원해야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것들, 나는 지금도 그런 거에 이끌려요.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