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병명은 마약중독·(1)] 마약중독자 간병하는 가족


클럽서 호기심에 접하고 중독자돼
해외가서 재활했지만 사실상 실패
엄마는 고통받는 사람돕는 활동가로

너무쉽게 시작… 초범이라 벌금형
치료할 질병 깨달았지만 병원 부족
엄마는 국내·외 논문 보며 공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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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마약류 중독치료 전담병상을 운영하는 공공마약 중독치료센터를 운영한다. 마약중독치료센터는 외래·입원치료 모두 가능하며 안정실 3병상과 일반병상 10병상을 운영 중에 있다. 사진은 용인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에서 직원들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 부모가 자식을 교도소에 밀어넣었던 이유

"변호사님, 제발 교도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불구속 입건은 안됩니다."

이선민씨가 꺼낸 뜻밖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선민씨의 아들 정호(가명)는 자수했다. 스스로 '마약'을 했노라 경찰에 자신을 신고했다. 엄마는 변호사에게 더 강한 처벌을 부탁했다. 그래야만, 정호가 살 수 있어서다. 마약중독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2년 전, 선민씨는 정호의 손을 붙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클럽에서 호기심에 마약을 접한 정호는 어느새 '중독자'가 돼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범죄, 교도소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아주 보통의 삶을 살아왔던 선민씨는 덜컥 겁부터 났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아들이 교도소에 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약=범죄'인 한국에선 도저히 난관을 헤쳐나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외국에 가면 정호가 마약을 끊고 다시 예쁜 아들로 돌아올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거란 절박하고 막연한 희망을 붙잡고.

지인들에겐 유학이라 핑계대며 호주에 갔다. 아들의 단약을 위해 아빠는 생업까지 포기하며 정호를 따라갔다. 하지만 선민씨의 판단은 얼마 못가 오판이 됐다. 호주에서 정호는 SNS를 통해 더 손쉽게 마약을 구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이번엔 태국으로 갔다. 태국의 마약재활시설에 가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극복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믿음은 한달을 넘기지 못했다. 재활시설에서 퇴소한 후 홀연히 사라진 정호는 다시 약을 찾았다. 겨우 찾아낸 아들은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조차 못한 채 약에 취해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다. 태국에서 싱가포르로 정호를 옮겼다. 싱가포르에선 대학생활과 단약을 병행했다. 정호의 의지도 강했다.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했고, 반년 만에 단약에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다고 믿었다. 또 정호가 사라졌다. 선민씨가 아들을 다시 찾았을 땐, 믿음은 깨져 있었다.

"정호 사진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소문하며 찾아다녔습니다. 어떨 땐 정호가 스스로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 말해요. 가보면 이상한 쪽방 같은 모텔에 토사물과 땀에 범벅된 채 계속 중얼거려요. '누가 나를 잡으러 와요'.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어요. 그걸 보는 부모 마음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끌어안고 같이 울었습니다."

선민씨는 정호 스스로 마약을 끊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정호를 데리고, 온 가족이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정호는 스스로 경찰을 찾아갔다. 교도소에서 강제로 약과 차단되는 방법 말곤,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했다. 제발 우리 아들, 교도소에 있게 해달라고.

"교도소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마약 중독자에요. 범죄지만 병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중독자가 치료받거나 재활을 통해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선민씨의 말대로, 불행히도 교도소 수감은 치료법이 되지 못했다. 단약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2년 6개월을 수감됐다 출소한 정호는 다시 마약을 찾았고, 자수하기를 반복했다. 주기는 더 짧아졌다. 출소하자마자 마약을 했고, 병원에 입원해 몇개월 버티다가도 핸드폰을 받자마자 다시 약을 찾기도 했다.

정호는 그때마다 괴로워하고, 정신이 들면 스스로를 신고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 정호와 선민씨는 교도소에 갇혀만 있다고, 약과 완전히 단절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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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마약류 중독치료 전담병상을 운영하는 공공마약 중독치료센터를 운영한다. 마약중독치료센터는 외래·입원치료 모두 가능하며 안정실 3병상과 일반병상 10병상을 운영 중에 있다. 사진은 용인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에서 직원들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전쟁 같은 '투병생활'에 끝은 있을까. 수년간 아들의 단약을 간병해온 선민씨는 어느새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가가 됐다. 기독교마약중독연구소를 설립해 숨어있는 마약중독자와 이를 '간병'하는 가족을 돕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마약중독자를 가족으로 둔 가정은 다같이 숨어버립니다. 범죄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만 강렬하니까요. 범죄라는 인식만 있고, 단약, 재활 같은 재사회화에 대한 공적 지원이 없어요. 오로지 민간에만 의존하는 상황에서 (최근 논란이 불거졌던) 민간 재활시설인 다르크가 폐쇄되는 일은 예견된 결말이자, 현실입니다."

■ 엄마, 마약중독 자녀를 위해 마약을 공부하다

준희(가명)는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이였다. 대학생이 돼서도 성적장학금을 타올 만큼 똑똑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엄마 이경선(가명)씨와는 사소한 일까지, 스스럼없이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그날 준희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엄마 내가 마약이란 걸 해봤는데, 기분이 정말 좋아져. 엄마도 이런 걸 해봤으면 좋겠어."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약'을 말했다. 아이를 너무 믿었기 때문일까.

"그때는 아이도 잘 몰랐고, 저도 정말 잘 몰랐어요. 성인이 되면 다들 호기심에 클럽도 가고 술도 마셔보고 그러니까, (저는) 마약도 그런 정도일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땐 마약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굉장히 막연했어요. 생각해보면 학교나 매체에서도 마약이 구체적으로 왜 나쁜지 한 번도 알려준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때가 골든타임이었는데…."

마약 자체를 몰랐던 '첫번째 무지(無智)'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치고 결국에 준희는 마약중독이 됐다. '두번째 무지'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준희는 '마약투약'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어느새 경선씨는 준희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범이라 벌금형에 그쳤지만, 그건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마약투약으로 법에 걸린 일이 '처음'이라는 것이지, 마약투약이 처음이 아니었다. 숱하게 마약을 투약해야, 법에 걸리는 수준에 이른다.

'평범한 내가 마약사범이 됐다'는 충격은 준희가 단약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별다른 제재 없이 다시 사회로 나온 '불행 중 다행'은, 준희가 마약에 그대로 다시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걸. 준희는 얼마 못 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 그제서야 경선씨는 자신의 무지를 탓했다.

"(벌금형으로 나왔을 때) 바로 갈 수 있는 병원이나 재활시설을 알았더라면, 준희는 마약에서 빠져나오지 않았을까, 결국 교도소에 가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까지도 제가 마약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구요. 아이가 다시 마약에 손에 댔을 때에야 국가가 지정한 마약전문병원 20여곳을 알아봤지만 '의사가 없다' '2~3개월 대기해야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마약이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문제는 주변에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다. 중독전문의·병상 부족, 치료기피 등으로 전국에 딱 2곳 병원만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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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마약류 중독치료 전담병상을 운영하는 공공마약 중독치료센터를 운영한다. 마약중독치료센터는 외래·입원치료 모두 가능하며 안정실 3병상과 일반병상 10병상을 운영 중에 있다. 사진은 용인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에서 직원들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결국 경선씨는 직접 두 팔을 걷어붙였다. 준희를 위해 스스로 '마약 전문가'가 되기로 했다. 그때부터 경선씨는 '마약'을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국내 서적과 논문을 뒤졌다. 이걸로도 모자라 미국이나 필리핀 등 해외 논문까지 찾아 마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온통 마약치료를 공부하는 일 뿐이었어요. 번역기를 돌려서 해외 논문을 읽고, 잠들기 전까지 마약, 치료 관련 영상을 보면 하루가 끝나죠. 나중엔 제가 미칠 것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그래도 어쩌나요. 부모가 알아야 도와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미친듯이 했던 것 같아요."

준희가 갈망이 올 때면 도파민을 분출시켜 갈망을 이겨내도록 도와야 했다. 준희와 함께 낮이고 밤이고 뛰러 나갔다. 심하게 갈망이 올 때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땀범벅이 될 때까지 뛰어야 괜찮아지던 준희를 바라보는 일은 경선씨에게도 고통이었다.

이 악물고 1년을 버텼다. 준희는 잘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단약 치료 중 재발을 했고, 그 일로 결국 교도소에 수감됐다.

재판부의 시각에서, 준희는 초범이 아니라 재범일 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준희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좌절했지만, 준희는 지금도 열심히 단약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법이 판단한 죄는 끝났지만, 단약으로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다. 마약중독은 언제든 재발이 가능해서,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재발이 반복되면 가족이 지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단약치료를 돕는 가족들이 하나씩 병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럼에도 내가 강해져야 아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공지영·이시은·이영지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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