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32)] 소래포구에서 자란 사자, 라이온킹 입니다


출생직후 부모님따라 소래포구서 유년
"시장 같은 예전 모습, 지금 거의 사라져"
동네서 큰 키 유명… 각종 운동 푹 빠져

길거리 농구하다 뒤늦게 안남중팀 입단
신생 제물포고 이끌고 창단 첫 전국 우승
중앙대 시절 김선형과 콤비, 52연승 위업

대학부터 태극마크… 인천아시안게임 金
"자란 곳에서 금메달, 영광이자 자부심"
화려한 이력과 달리 "소소한 행복 만족"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라이온 킹'이란 칭호는 종목마다 단 한 명의 선수에게만 부여됐다. 야구 이승엽, 축구 이동국, 그리고 농구에서는 인천 출신 국보급 센터 오세근(서울 SK 나이츠)이 있다.

2011년 한국프로농구(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안양 KGC 인삼공사 유니폼을 입은 '갈색 사자머리'의 오세근은 입단 첫해부터 골대 밑을 지배하며 '왕좌'(2011~2012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에 올랐다.

'2011~2012 프로농구 시상식' 오세근, 신인 선수상 수상
2011~2012 시즌 KBL 신인 선수상을 수상한 오세근. /경인일보DB

4차례의 KBL 우승, 3차례의 챔피언 결정전 MVP, 정규 시즌 MVP를 차지하며 오세근의 시대를 이어갔다. 국가대표 농구팀 센터로 출전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각각 은메달과 금메달을 따낼 때 큰 힘을 보탰다.

완숙기에 접어든 오세근은 12년 동안 몸담았던 안양 KGC에서 지난해 서울 SK로 이적해 한 시즌을 치르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KBL '라이온 킹'은 아직 권좌를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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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안남중.

지난달 16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 체육관에서 2024~2025 시즌 준비에 한창인 오세근을 만났다.

어린 사자가 뛰놀던 곳은 대초원이 아니라 서해의 포구다. 부모님은 충북 청주에서 오세근을 낳자마자 인천으로 이주했고, 소래포구에서 회와 각종 해산물을 파는 가게 겸 식당을 30년 넘게 운영하다 접었다. 오세근의 조부모가 먼저 소래포구에서 장사했다고 한다.

오세근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90~2000년대 초반은 소래논현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약 1만2천가구)가 들어서기 전이라 지금보다는 더 어촌다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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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나이츠 오세근 선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금은 소래포구 주변 환경이 워낙 많이 변해서 어릴 때 모습은 거의 없다시피 하네요. 예전엔 시장 같은 느낌이 더 컸고요. 배가 들어오면 그물째로 해산물을 옮기는 모습도 신기했습니다. 그땐 갯벌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래포구를 키운 건 실향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이다. 1960년대 초 인근 섬 지역과 인천 연안부두 등지에서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를 위해 소래포구로 모여들었다. 어민들은 1962년 2월 소래어촌계를 결성했다. 1970년대 초에는 어선들이 어획물을 하역할 수 있는 물양장도 조성됐다. 1982년 인천항에 소형 어선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어선들이 소래포구로 대거 몰렸다

횟집도 번성했다. 정부는 1983년 무허가 횟집을 양성화했는데, 이때 소래포구 주민 32명이 허가를 얻었다. 1984년 11월 한 달 동안 소래포구를 찾은 관광객은 18만명을 넘었고, 관광버스가 하루 100대씩 오갔다.

소래포구
오세근이 어린 시절 보았을 1998년 12월27일 관광객이 몰린 소래포구 풍경. /경인일보DB

오세근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도 전에 키 170㎝를 넘겼다. 소래포구 동네에서도 중학생 형들보다 큰 키로 유명했다. 조용한 성격이라서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잠시 볼링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농구와 축구 가릴 것 없이 운동이라면 다 좋았다.

중학생이 돼서도 운동부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운동을 취미로 아주 열심히 즐겼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농구에 푹 빠졌다고 한다. 오세근이 미추홀구 주안동에 살면서 동인천중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집 근처 인천고등학교 농구 코트가 그의 주무대였다.

1997년 KBL 출범과 일본 농구 만화 '슬램덩크' 신드롬에 힘입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길거리 농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인천에서도 지자체, 사회단체 등이 각종 청소년 길거리 농구대회를 개최했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현 롯데백화점 인천점 자리)은 1999년 3월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길거리 농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키만 조금 컸지, 길거리 농구를 평정할 실력까진 아니었어요. 그저 친구들과 즐겁게 농구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송도중학교에서 개최한 길거리 농구대회에 출전했는데, 주최 측에서 저를 잘 봤는지, 저에 대한 얘기가 농구부가 있는 계양구 안남중학교 코치님한테까지 들어갔다고 합니다. 코치님이 동인천중까지 찾아와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오세근은 2002년 여름 안남중학교로 전학해 농구부에 입단했다. 운동을 일찍 시작한 선수들보다 체력과 기본기 모두 부족했다. 대회에서는 8강에 오르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아쉬운 성적이었다.

오세근은 더 좋은 선수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고, 학교 코치와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유급을 결정했다. 그리고 학교 인근에 사는 농구부 동기의 집에 머물면서 1년 더 연장한 중학교 생활을 오로지 운동으로 채웠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그 덕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출 수 있었다.

오세근은 2004년 제물포고등학교로 입학해 농구부에 입단했다. 인천에서는 송도고등학교 농구부의 역사가 더 깊었고, 서울의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입학 제의가 있었으나, 오세근은 "안남중 동기 6명과 함께 운동하고 싶어서" 제물포고를 택했다.

제물포고 농구부
경인일보 1998년 5월7일자 신문에 실린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 창단 관련 기사. /경인일보DB

제물포고 농구부는 송도고에 이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창단한 고교 농구부다. 1998년 5월7일 창단했다. 경인일보 1998년 5월7일자 신문에 실린 '港都(항도) 바스켓 새요람 선언'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면 창단 선수는 10명, KBL 광주 나산 플라망스 트레이너직을 맡았던 김태일 코치로 팀을 꾸렸다. 오세근의 모교인 안남중과 효성중 선수들을 영입했다. 제물포고 출신으로 연세대 농구부와 한국은행 실업팀, 국가대표에서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최종규 당시 KBL 대우 제우스 감독을 중심으로 제물포고 동창과 조기농구회 '농우회'가 1997년 10월 후원회를 조직해 농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제물포고 농구후원회가 농구부 창단을 위해 모은 기금은 3천만원이었다.

제물포고 농구부가 초창기 기반을 닦는 데에는 1997년 인천을 연고지로 창단한 프로농구단 대우 제우스가 많은 도움을 줬다. 제물포고 농구부 창단식에도 대우 제우스 오기택 단장, 최종규 감독, 훗날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재학 코치, 선수들이 참석했다.

제물포고와 대우 제우스의 친선 경기도 개최했다. 대우 제우스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여파로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그해 신세기통신으로 넘어가 신세기 빅스(SK 빅스), 2003년 전자랜드 엘리펀츠(블랙슬래머)로 이어졌다. 2021년 한국가스공사가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인수해 연고지를 대구로 옮기면서 인천 프로농구단의 명맥이 끊겼다.

신생 제물포고 농구부는 고교 농구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으나, 첫 우승은 오세근이 3학년 재학 중이던 2006년 8월24일 제1회 고려대총장배대회(옛 쌍룡기)에서 이뤄냈다. 키 2m에 육박한 '빅맨' 오세근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다.

2006년 부임해 현재까지 제물포고 농구부를 이끌고 있는 김영래 코치는 고교 시절 오세근에 대해 "보자마자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영래 코치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세근이는 농구에 대한 센스와 기본기가 워낙 좋은 선수였습니다. 신장에 비해 스피드가 빠르고 체격 조건도 좋았죠. 가장 큰 장점은 성실함과 농구에 대한 집중도였습니다. 당시 전국 고교에선 두각을 나타낸 장신 센터가 4명 정도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 오세근은 네 번째 정도였습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한 탓도 있었죠. 서울의 한 고등학교와 시합을 하는데, 세근이가 전국 최정상급 센터와 맞붙었어요. '시합에서 져도 좋으니 저 선수를 철저히 맨투맨으로 막고 40점을 득점하라'고 세근이에게 주문했죠. 정말로 그 경기에서 상대 선수보다 득점과 리바운드를 두 배 이상 해냈어요. 그때부터 오세근은 랭킹 1위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2007년 중앙대 농구부로 진학한 오세근은 현재 서울 SK 동료이기도 한 가드 김선형과 함께 대학리그에서 파죽지세로 52연승이란 진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2010년 대학리그에선 상명대와 맞붙어 14점, 18 리바운드, 13 어시스트, 10 블록으로 한국 농구 역사상 첫 '쿼드러플 더블'을 달성했다. 오세근은 이미 대학생 때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 뛰었다.

오세근 농구선수
안양 KGC 시절 오세근의 경기 모습.

2011년 프로 데뷔 무대에서도 안양 KGC의 정규리그 2위에 이은 창단 첫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며 '신인왕'에 등극했다. 그동안 너무 쉬지 않고 질주한 탓이었을까.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이듬해 2012~2013 시즌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재활에 집중해야 했다.

2016~2017 시즌에는 팀의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만들었고,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휩쓸었다. 오세근은 안양 KGC 시절에 대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선수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팬들이 붙여 준 또 다른 별명 '건세근'은 '건강한 오세근은 아무도 못 막는다'는 뜻으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프로농구 정규리그 시상식]오세근 'MVP' 강상재 '신인상'
2016~2017 시즌 KBL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오세근. 그는 이 시즌 올스타전과 플레이오프 MVP까지 모두 휩쓰는 대기록을 세웠다. /경인일보DB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을 찍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안양에서 좋은 기억이 더 많아요. 국제대회도 많이 나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아무래도 제가 자란 곳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입니다. 인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어 큰 영광이었고, 저의 자부심입니다."

오세근은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해진다. 큰 경기를 앞두고는 농구 코트뿐 아니라 일상까지도 경기에 맞춰 집중력을 쏟아붓는다고 한다. 사춘기를 겪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소 내성적이면서 무난한 성격이 오세근의 집중력을 만드는 동력 중 하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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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라이온 킹’ 오세근.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는 세 남매의 아빠다. 가정적인 선수로도 유명하다. 그 모습은 오세근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라이온 킹의 인생 목표가 의외다. "그냥 무탈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소한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농구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오세근은 "99% 노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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